흰색과 레드의 야마하 오토바이 - 찍지 않은 사진과 남은 사진 한 장
기억은 기어를 거꾸로 넣고 달린다
- 후진의 감각으로 바라본 사랑과 삶 5편
대학 신입생 때의 일이다.
학과에서 미팅이 있었다.
독수리 다방 2층에 모여 앉았다.
상대는 그 대학의 신입생들이었다.
당시의 미팅은 십 수명이 모여 앉아서
학고팅*을 한다.
각자 소지품을 꺼낸다.
그리고
1순위 손수건
2순위 시계
3순위 라이터
뭐 그런 식으로 써서 내는 것이다.
(*학력고사는 수능 이전의 대입 시험이다. 대학을 순위별로 지원했었다.)
주선자는
1순위부터 연결해 준다.
연결된 커플은 하나도 없다.
다 몰표라고 했다.
나와 어떤 남학생만 커플이라고 한다.
민망하다.
그 남자도 민망한가 보다.
당시 카페에는
장미를 파는 사람이
투명한 비닐에 붉은 장미 한 송이씩 포장해서
사달라고 조르곤 했었다.
마침
장미 파는 사람이 왔다.
주선자가 그걸 한 송이 사서 남학생에게 주면서
나가라고 한다.
민망하다.
그 남자도 민망한가 보다.
다들 둘이 먼저 나가라고 성화다.
그렇게 독수리 다방을 나와서
몇 번 만났었다.
자기 전공과는 상관없이
연극에 푹 빠져있던 친구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나.
그의 학교에 갔었다.
오래된 건물의 옆에
야마하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었다.
그는
빨간 말보로 레드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하얀 연기가
빗방울 사이로 피어오른다.
하얗고 빨간 오토바이와
빨간 티셔츠의 그와
빨간 담뱃갑
빗방울이 스치고
안개처럼
그는 필터를 씌운 것처럼
그리스 조각상의 프로필 같았다.
찰칵하고
한 장의 사진처럼
찍지도 않은 사진이
떠오른다.
연극팀에서
공연을 한다고 해서
같이 구경을 갔던 적도 있다.
조용히 연극을 보는 줄 알았더니,
왁자지껄하게 사람들이 모여서
환호성에
시끌벅적하다.
고등학교 선후배들과
교수님 모두에게
하나하나 인사를 다 시키고는
어디론가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다.
공연은 보지도 못한 채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 늘어진다.
연극 무대에서 사라지듯,
그는 내 마음 속에서도 곧 사라졌다.
그다음에도 만날 때마다
연극 공연을 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였는지
그 조각을 깎아 놓은 듯한
그 남학생과는
헤어졌다.
하긴, 뭐 만난 적도 없지만.
초록색 담쟁이가 뒤덮인
고풍스러운 서양식 건물 처마에서
하얗고 빨간 야마하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빨간 말보로 레드를 피우던
그의 프로필은
참 멋지다.
지금은 한 장의 사진으로 마음에 남아 있다.
비오는 담쟁이 덩쿨을 배경으로
그는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