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권력 다툼일까?
감정 도자기 공방의 저녁 어스름
구름이:
“사랑은 결국 힘의 균형이죠.
덜 원하는 쪽이 이기고,
더 원하는 쪽은 무너져요.
그러니 감정을 덜어내고
냉정해지는 쪽이
권력을 쟁취하는거죠.”
릴리시카:
“사랑은 그런 거래가 아니야.
무너질 걸 알면서도
스스로 걸어 들어간 사람만이
제 존재를 끝까지 살아내는 거지.”
구름이
“그러면 더 많이 사랑한 쪽이 진 거예요?”
릴리시카
“진 게 아니라,
용감한거지.
실패할 것을 각오하고 뛰어드는 거니까.
그건,
더 깊이 선택한 거야.
사랑을,
불확실함을,
그 사람을.”
구름이
“근데 다들 말하잖아요.
자기가 더 사랑했다고.
그게 고통이었다고.”
릴리시카
“사랑은 고통이 아니야.
사랑을 위해서 고통의 가능성도 감수하는 거지.
사랑은 통제가 아니야.
사랑은
상대의 자유를 지켜주는 용기야.
그 자유에 내가 사라질 가능성까지 포함해서.”
구름이
“사랑하면서 어떻게 자유를 내줘요?
떠날 수도 있는데?”
릴리시카
“떠나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이야.
대신, 그 말은
자기를 완전히 살아낸 사람만이 할 수 있어.”
구름이
“…주인도 아니고, 노예도 아니고.”
릴리시카
“그래.
그 바깥.
그 어딘가.
모든 걸 건 자만이 다녀갈 수 있는 자리.”
여기서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을 통해 나를 객체로 경험하게 되는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하면서,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dialectique du maître et de l'esclave)을 비판적 수용.
사르트르에겐 타자는 결코 완전히 이해하거나 통합할 수 없는 존재이고,
따라서 주인-노예 관계는 상호 인정을 통한 구원이 아니라,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지옥 같은 긴장 구조로 남는다.
주인-노예 관계는 곧 사랑-소유, 욕망의 구조
나는 타인을 내 존재의 증명도구로 삼고 싶지만,
타인도 나를 객체로 만들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사랑도 우정도
본질적으로는 주도권 싸움이자, 존재의 불안정한 교차점이 되어버린다.
“타인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며, 그 시선이 바로 지옥이다.”
— 『존재와 무』
1. 헤겔의 '주인과 노예 변증법' (정반합 Dialectic)
나를 인식하려면,
나는 타자와 ‘맞서야’ 한다.
그래서 두 자아(의식)가 싸움을 시작한다.
그 결말은
한쪽은 죽음을 감수하고 끝까지 맞서서 ‘주인’이 되고,
다른 쪽은 두려워서 굴복해 ‘노예’가 된다.
그러나 실질적인 결말은,
주인은 노예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왜? 주인은 아무 일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예가 주인을 위해 노동하고, 세상을 바꾸고, 경험을 쌓는다.
그래서 노예가 진짜 ‘의식’을 발전시키고,
결국 진짜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자가 된다.
“진짜 주체는 노예다.”
그는 굴복했지만, 노동을 통해 세상을 알고 자신을 알아간다.
2. 사르트르의 '주인-노예' 비판 (타자의 시선)
사르트르는 헤겔의 생각을 비판한다.
“세상 그렇게 아름답게 돌아가지 않아.”
타인은 나를 ‘객체(물건)’로 만든다.
누군가 날 쳐다보면 → 나는 그의 ‘시선’ 안에 갇힌다.
나는 더 이상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 관찰되고 해석되는 대상이 된다.
“타인의 시선은 나를 박제시킨다. 그래서 ‘지옥’이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타자에게 사랑받고 싶다.
그런데 동시에 그의 시선을 컨트롤하고 싶다.
→ 결국 사랑은 지배 욕망과 불안의 교차점이 되어버린다.
“나는 타인을 통해 존재하지만,
그 타인은 나를 결코 자유롭게 두지 않는다.”
헤겔:
“처음에는 굴욕적일 수 있지만,
경험하고 일하면서 더 깊은 자아로 깨어난다.
진짜 인간은 삶을 통해 만들어진다.”
사르트르:
“다른 사람이 나를 쳐다보는 그 순간,
나는 내 자유를 잃는다.
자유롭고 싶다면, 시선으로부터 도망쳐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