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기어를 거꾸로 넣고 달린다

– 후진의 감각으로 바라본 사랑과 삶, 지리산 편

by stephanette


대학 시절,

기말고사가 끝난 뒤 친구들과 지리산에 올랐다.

노고단 등산을 계획하며,

우리는 김밥을 싸기로 했다.


요리는커녕 칼질조차 서툰 다섯 명의 여자아이들은

밤새도록 김밥 재료를 손질하다

새벽 한 시가 넘어서야 잠들었다.


눈을 뜨니 점심시간.

하산 시간이 걱정됐지만,

우리는 무작정 산을 올랐다.


소복이 쌓인 눈 위로

길과 돌이 구분되지 않았다.

등산객도 거의 없었고,

첫눈을 밟으며 노고단을 올랐다.


적당한 바위에 앉아

도시락을 펼쳤지만,

돌처럼 식어버린 김밥은

목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바람은 싸늘했고

주변은 눈, 그리고 검은 나무들.

우리는 흑백사진 속 인물들처럼

고요한 풍경 안에 잠겨 있었다.


하산길에 해가 졌다.

해는 우리가 내려가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사라졌다.


산속의 어둠은

밀도 높은 암흑이었다.

작은 액정 불빛에 의지해

우리는 겨우 평지에 가까운 길에 닿았다.


그때였다.

거대한 부처 조각상이 어둠 속에서 앉아 있었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다행히 나만 본 것은 아니었다.


야외 조각상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암흑 속에서 마주한 그 형상들은

기묘했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지쳐 있었고

이상하게도 말이 없었다.


그러다 누군가 말했다.

"뭔가 한 번도 안 해본 거, 해볼래?"

'분신사바'였다.


돌고 돌아

내 차례가 되었다.

펜이 이상한 도형을 그리더니

느리게, 천천히,

한 단어를 남긴다.


"日本"


모두 숨을 삼키며

신음 같은 소리를 냈다.


그날 밤,

우리는

무서운 이야기만

속삭이며 잠들지 못했다.


다음날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

우리는 제일 뒷자리 다섯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괜히 뒤를 돌아봤다.

누군가,

머리카락을 당기고 있는 것 같아서.


#분신사바실화 #지리산첫눈 #한국형오컬트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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