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만나지 않은 이가 나를 기억하는 오후 3시 16분의 사건
어느 날 아침, 주인공은 평소처럼 세탁을 시작했다. 하지만 빨랫감은 평범한 수건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들은 마치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것처럼 기이하게 울컥이며 돌아갔다. "이 수건들은 말을 걸어올지도 몰라, "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아니, 정말로 수건 하나가 잠깐 눈을 깜빡인 것 같았으니까.
세탁기에서 수건들이 춤을 추고 있을 때, 그녀는 불쑥 튀어나온 하얀 수건의 실오라기를 움켜쥐고 세탁기에 다시 넣고 있었다. 순간 세탁기의 둥근 구멍 속으로 그녀는 빨려 들어갔다. 마치 토끼 동굴 같이 생긴 그곳은 끝도 없이 깊고 그녀는 계속 아래로 떨어졌다. 주변의 나무뿌리라도 움켜잡으려고 했으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어서 그런 노력은 모두 허사였다. 결국 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동막해수욕장'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바다는 시무룩하게 굴었고, 파도는 무언가 말을 삼킨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는 앞에 보이는 '모자 장수의 칼국수 집'으로 들어갔다. 간판은 "여기서 국수 먹은 자,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라고 속삭이는 듯했고, 유리창엔 누군가 손바닥으로 찍은 듯한 얼룩이 마치 고양이의 발자국처럼 남아 있었다.
“칼국수 하나 주세요.” 그녀는 현실을 유지하기 위해 주문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이내 미끄러졌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문은 삐걱거리지 않았지만, 시공간은 삐걱거렸다. 그는 걸어오는 게 아니라, 미끄러지듯 그녀 앞에 다가왔다. 그의 발아래엔 그림자가 없었고, 그의 신발은 마치 종이로 접은 듯 가벼워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낯설었고, 익숙했다. 꿈에서 봤던 수수께끼 같은 얼굴. 아니, 거울 너머에서 웃고 있던 체셔 고양이 같기도 했다. 존재하고 있으나 반쯤 사라지고 있는 미소만 남은 형체.
그는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그 말은 그녀의 귀에 꽂힌 열쇠처럼 마음의 문을 열었다. 기억도, 감각도, 정체성도 흐릿해졌다. 그녀는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는 이름을 주지 않았다. 이 세계에선 이름을 부르면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국수가 나왔다. 그릇 안에선 김이 아니라 안개가 피어올랐다. 조개는 조개가 아니고, 면발은 실뱀처럼 살아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이건 이상한 나라였고, 그녀는 이미 너무 오래 앨리스였으니까.
그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닷바람은 대화처럼 속삭였고, 유리창의 물방울은 문장처럼 흘러내렸다. 시간이 멈춘 듯한 그 식탁 위에서, 그녀는 생각했다.
"그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고, 나는 아직 그를 만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국물 속에 떠오른 조개껍질이 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