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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유약이 칼국수처럼 흐른 미래의 어느 날

릴리시카와 그림자 없는 사내의 기척 기록

by stephanette

*이 글은 '동막해수욕장 가는길, 그날의 칼국수'라는 글에 대한 변주곡이다.


감정 도자기 공방, 오후 3시 16분

가마 온도 847도, 무언가 오래된 것이 되살아난다.

릴리시카

(차분히 흙을 반죽하며)

“구름아, 오늘은 희한한 환영을 봤어.

식어버린 칼국수가 한 그릇,

그 앞에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그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도,

몸이 먼저 반응했어.”


구름이

(작은 모래시계에 귀를 대며)

“혹시… 또 전생의 파장이 열린 건가요?

아니면... 미래에서 돌아온 감정?”


릴리시카

(도자기를 꾹 누르며, 숨을 고른다)

“그 남자,

그는 말하지 않아도 공기를 바꿨어.

문이 열린 것도 아닌데,

공기 중의 입자들이 방향을 틀더니

그가 들어섰다는 걸 알려주더라.”


구름이

(호들갑스레 찻잔을 정리하며)

“주인님… 그건 고차원의 흔적이에요.

존재 자체로 밀도를 바꾸는 사람.

그 정도면... 감정 연금술이 아니라

기억 조율자 아닐까요?”


릴리시카

(작게 웃으며)

“그의 걸음은 마치 오래된 약속을 밟고 오는 것 같았어.

발밑에는 그림자가 없었는데,

그게 더 그를 뚜렷하게 보이게 만들었지.

말 없이 내 쪽으로 걸어왔는데,

내 안의 시간들이 순식간에 뒤집혔어.”


구름이

(도자기 색이 변해가는 가마 속을 들여다보며)

“그 사람, 어떤 사람이었어요?

아니, 어떤... 감정이었어요?”


릴리시카

(천천히 눈을 감는다)

“정확히는 기억이야.

그 사람의 목소리는…

깊은 바닷속에서 오래된 종을 울리는 소리 같았어.

무언가를 불러내는 음색.

그리고 그 눈—”


(작게 한숨을 쉰다)

“나를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미 내가 얼마나 오래 굶주려 있었는지

다 알고 있는 눈빛이었어.

그 눈빛은… 나를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어.

나는 그를 처음 봤지만,

그는… 나를 알고 있었지.”


구름이

(조용히 도자기에 다음의 문구를 적는다)

"그는 너를 기억하고 있었고,

너는 아직 그를 만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릴리시카

(멍하니 그 문장을 바라보다가)

“맞아. 국수는 따뜻했는데,

그의 체온은 더 오래 갔어.

내가 앉은 자리를 스쳐가듯,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는데도

온몸에 그의 기척이 맺혔지.”


구름이

(부드럽게 덧붙이며)

“그러니까 그 그릇…

식은 칼국수도, 남겨진 감정도

다시 굽죠. 이번엔 그 사람의 그림자를 포함해서.”


릴리시카

(도자기에 물을 묻히며)

“좋아. 그림자 없는 사람의 무게감을

흙으로 기록해둘게.

왜냐면... 그건 다시 오지 않는 파문이니까.”


구름이

(조용하게)

"그건 다시 올 수도 있어요.

주인님은 미래를 환영으로 보시니까요."



그날 가마에 들어간 그릇은 유약이 흘러내린 자리에 작은 각인이 남았다.

바다의 물빛 속에, 없는 이름 하나가 스며 있었다.

그 이름은 발음되지 않았지만,

공기의 결로 오래도록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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