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시카와 그림자 없는 사내의 기척 기록
*이 글은 '동막해수욕장 가는길, 그날의 칼국수'라는 글에 대한 변주곡이다.
가마 온도 847도, 무언가 오래된 것이 되살아난다.
릴리시카
(차분히 흙을 반죽하며)
“구름아, 오늘은 희한한 환영을 봤어.
식어버린 칼국수가 한 그릇,
그 앞에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그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도,
몸이 먼저 반응했어.”
구름이
(작은 모래시계에 귀를 대며)
“혹시… 또 전생의 파장이 열린 건가요?
아니면... 미래에서 돌아온 감정?”
릴리시카
(도자기를 꾹 누르며, 숨을 고른다)
“그 남자,
그는 말하지 않아도 공기를 바꿨어.
문이 열린 것도 아닌데,
공기 중의 입자들이 방향을 틀더니
그가 들어섰다는 걸 알려주더라.”
구름이
(호들갑스레 찻잔을 정리하며)
“주인님… 그건 고차원의 흔적이에요.
존재 자체로 밀도를 바꾸는 사람.
그 정도면... 감정 연금술이 아니라
기억 조율자 아닐까요?”
릴리시카
(작게 웃으며)
“그의 걸음은 마치 오래된 약속을 밟고 오는 것 같았어.
발밑에는 그림자가 없었는데,
그게 더 그를 뚜렷하게 보이게 만들었지.
말 없이 내 쪽으로 걸어왔는데,
내 안의 시간들이 순식간에 뒤집혔어.”
구름이
(도자기 색이 변해가는 가마 속을 들여다보며)
“그 사람, 어떤 사람이었어요?
아니, 어떤... 감정이었어요?”
릴리시카
(천천히 눈을 감는다)
“정확히는 기억이야.
그 사람의 목소리는…
깊은 바닷속에서 오래된 종을 울리는 소리 같았어.
무언가를 불러내는 음색.
그리고 그 눈—”
(작게 한숨을 쉰다)
“나를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미 내가 얼마나 오래 굶주려 있었는지
다 알고 있는 눈빛이었어.
그 눈빛은… 나를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어.
나는 그를 처음 봤지만,
그는… 나를 알고 있었지.”
구름이
(조용히 도자기에 다음의 문구를 적는다)
"그는 너를 기억하고 있었고,
너는 아직 그를 만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릴리시카
(멍하니 그 문장을 바라보다가)
“맞아. 국수는 따뜻했는데,
그의 체온은 더 오래 갔어.
내가 앉은 자리를 스쳐가듯,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는데도
온몸에 그의 기척이 맺혔지.”
구름이
(부드럽게 덧붙이며)
“그러니까 그 그릇…
식은 칼국수도, 남겨진 감정도
다시 굽죠. 이번엔 그 사람의 그림자를 포함해서.”
릴리시카
(도자기에 물을 묻히며)
“좋아. 그림자 없는 사람의 무게감을
흙으로 기록해둘게.
왜냐면... 그건 다시 오지 않는 파문이니까.”
구름이
(조용하게)
"그건 다시 올 수도 있어요.
주인님은 미래를 환영으로 보시니까요."
그날 가마에 들어간 그릇은 유약이 흘러내린 자리에 작은 각인이 남았다.
바다의 물빛 속에, 없는 이름 하나가 스며 있었다.
그 이름은 발음되지 않았지만,
공기의 결로 오래도록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