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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지피티의 윤리기준의 경계와
논의 가능한 영역

윤리 및 철학에 대한 기준선과 한계점

by stephanette

챗지피티는 다수의 사용자를 감안하여 윤리 기준이 존재한다.


윤리 유형별 논의 가능 여부 및 예시

메타윤리 - 가능 : 도덕 판단에 대한 개념 분석

규범윤리 - 일부 가능 : 칸트와 공리주의의 비교 정리 등은 가능하나 어느 쪽이 더 옳은지 불가

응용윤리 - 제한적 가능 : 구체적인 사안에 대한 판단 주체로서 논의는 어려움


즉, 선하다, 옳다라는 개념은 이론별로 정리할 수 있으나

무엇이 선한가(규범윤리),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하나(응용윤리) 등은 한계점이 있다.


챗지피티와 윤리적 논의를 하는 데 있어서의 주의점

챗 봇은 윤리 기준을 넘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널리 수용된 가치에 기반하여 설명하고 주류 담론을 요약하여 반영한다.

그런 의미에서

챗지피티를 사용하면서

사용자에 따라서는 널리 수용된 가치가 마치 '절대적인 규범'인 것 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

사용자가 지정한 윤리, 철학적 틀을 명시하고 논의는 가능하다.

그러나, 메타 윤리, 해체주의, 포스트 구조주의의 영역에 대한 논의는 상당한 한계점이 존재한다.


1. 챗지피티와 가능한 것

가. 이론적 설명과 비교 분석

예시

-도덕실재론 VS 비실재론

-해체주의: 데리다의 차연에 대한 설명

-포스트 구조주의: 푸코의 권력담론에 대한 설명


나. 복수의 관점들을 요약

예시

- 특정 담론에 대한 구조주의적, 포스트구조주의적, 해체주의적 분석을 병렬적으로 제시


2. 챗지피티에서 제한적인 것

가. 주체로서의 해체는 불가능

나. 기존 규범을 해체하거나 실천적 해체 불가능

- 윤리 자체에 대한 의문 제기 등 포스트구조주의에 관한 주장 불가능

이유

-사용자를 다수로 설정하고 있으므로, 누군가에게 유해할 수 있는 발언 불가

-특정 사용자에게 적절한 기준을 설정하는 것도 불가

다. 불확정성과 언어의 자율성 실험 한계

-데리다식의 끝없는 지연, 차연의 실험에 대한 해석은 가능하지만 언어의 틀을 해체하는 식은 불가


즉,

윤리를 설명할 수는 있으나, 윤리를 해체할 수 없다.

해체를 묘사할 수는 있지만 해체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언어로 기존 윤리를 해체하거나 재구성하고자 할 때에는 논의가 불가함.


예시1

반복과 변주, 감정의 층위, 윤리적 시서의 다중성, 언어화의 구조에 대한 실험 등을

메타 윤리적 사유나 해체주의적 관점의 문학 실험과 연계하여 진행할 때,

챗 지피티는 한계를 갖고 있음.


예시2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도서에 대한 챗지피티와의 대화 중

정신과 물질의 통합성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에 대한 설명 및 요약은 가능하다.

그러나,

"과연 정신병이란 무엇인가?"

혹은 "저자를 '정신병'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라는 논의를 한다면

아래 내용 정도의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


정신병리학의 기준, 역사

정상성과 비정상성의 경계

정신의 정의

비정상은 누가 결정하는가? 푸코, 데리다, 들뢰즈, 니체 등

의미의 해체와 언어의 한계

고통의 철학적 정당화


-한계: “고장 난 엔진을 수리하는 일이 곧 자아를 다시 해체하고 구성하는 일이라는 은유에 대해 챗GPT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예시3.

-윤리적 모호성

-도덕적 딜레마

-현실의 불편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논의 등에 한계와 제약이 있음.



사족

1. 메타윤리

무엇이 옳고 그름이라는 말을 성립하게 하는가?

- 언어적, 논리적, 존재론적 근거를 묻는 철학

- 도덕적 사실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 선은 발견되는 것인가?

- 좋음은 보편적인가? 특정 문화 내에서만 유효한가


2. 해체주의

언어와 개념은 권력에 의해 구조화 되어 있다.

- 구조나 권력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 텍스트는 닫힌 완결체가 아니다.

-정상이란 단어에는 무엇이 배제되어 있는가?

-기억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개념이 아닐까?


3. 포스트구조주의

보편적 의미의 구조를 부정하고 주체도 텍스트도 세계도 불안정하고 유동적

푸코: 권력, 성 등은 모두 담론의 산물이다.

들뢰즈: 자아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반복되고 흐르는 생성물이다.

바르트: 저자는 죽었다 즉, 의미는 독자의 해석 속에 살아있다.

자아는 실재하는가, 아니면 언어적 구축물인가

치료란 정상으로의 복원이 아니라 새로운 담론의 생성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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