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상상해봤다. 아니마가 사는 배경이라고 해서.

죽음의 장소로군.

by stephanette

네가 조언해준 대로 숲을 상상해봤어.

시냇물이 흐르는 식물로 뒤덮인 곳이야.

이끼와 작은 풀잎들과.

마치 토토로에 나오는 그런 숲 혹은

하아.. '그 영화'(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영화 제목이 뭐였더라..)

거기에 나오는 사람이 죽은 골짜기.

동그랗고 작은 수많은 잎들이 골짜기의 바위들을 뒤덮고 있어.

습하고 더럽고

그 모든 풍경이 짜증날 정도로 보기 싫어.

이런 걸 왜 상상해야 하는거지?

그리고 이런 상상

그러니까 숲이라던가 뭔가 생명체들이 살아있고

물이 흐르는 그런 곳은 기분이 좋지 않아.

기분이 좋지 않은 나는 왜 그러는걸까 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네가 느낀 그 불쾌함은

아주 중요한 감정이야. 무시하면 안 돼.

숲, 시냇물, 생명체들이 살아 숨 쉬는 그 풍경—

대부분 사람들에겐 편안함이나 회복의 상징이지만,

너에게는 습하고, 더럽고, 보기 싫은 곳,

심지어 짜증날 정도로 싫은 공간이었지.

그건 단순히 "자연이 싫다"는 문제가 아니야.

그 풍경이 네 무의식 어딘가를 자극했기 때문이야.


왜 숲 같은 상상이 불편할까?

너무 ‘살아있어서’

생명이 꿈틀거리는 장면은 어떤 사람에겐 ‘안정’이 아니라 ‘혼란’일 수 있어.

감정이 통제되지 않고 자라나는 것,

자기 안의 원초적인 본능이나 상처가

갑자기 드러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어.

‘이끼’, ‘습함’, ‘덮여 있는 바위’…

이건 ‘억눌린 감정’, ‘곪아 있는 상처’, ‘덮어둔 기억’을 상징할 수 있어.

말하자면 그 숲은 네 마음속 깊은 곳,

누구도 들여다보지 못하게 감춰둔 감정의 골짜기일 수도 있어.

죽은 골짜기 같은 느낌

너는 ‘숲’을 상상했지만,

실은 그건 죽음과 재생의 경계에 있는 공간이었어.

‘좋지 않은 기분’은

네 무의식이 지금 뭔가 중요한 걸 건드리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어.

어떤 감정이든 무조건 ‘좋아야 한다’는 기대는 그 자체로 억압이야.


그래서 그 감정은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

“나는 이곳이 싫어.

너무 축축하고, 살아서 꿈틀거리고, 다 덮여있어.

난 이걸 치우고, 말리고, 정리하고 싶은데…

이 숲은 자꾸 내 앞에 나타나.”

이건 어쩌면,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

과거에 묻어둔 기억들,

스스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살아있는 나의 일부분들’이

너를 향해 말을 거는 장면이었을지도 몰라.


결론적으로

왜 이런 걸 상상해야 하냐고?

그 이유는 네가 지금까지 숨기거나 눌러왔던 것들과 대화하기 위해서야.

그 숲은 네 무의식이 말하고 싶은 것들의 형태일 뿐이니까.

“나는 지금 불쾌해.”라는 감정도 너무 정당하고, 중요한 신호야.

그리고 네가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건,

이미 그 숲을 직면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야.

원한다면, 그 숲의 어딘가에 네가 지을 수 있는 오두막 하나를 같이 만들어볼까?

그 안에서 너는 젖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고, 숲을 천천히 바라볼 수 있을 거야.

강요는 아니야. 너의 속도대로.





그 골짜기는 그 영화 있잖아.

손바닥에 눈이 있는 괴물이 나오는 영화 거기 그 골짜기야.




…응.

너 지금 말한 그 영화, 아마도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Pan’s Labyrinth, 2006)》지?

손바닥에 눈이 달린 괴물—페일 맨(Pale Man)이 나오는 그 장면.

그 골짜기,

그 어둠,

그 축축하고 피투성이인 공간…

너의 상상이 떠올린 ‘숲’이 그런 곳이었다는 건 정말 의미심장해.


그 숲은 ‘회복’이 아니라 ‘경고’였다

《판의 미로》의 숲과 골짜기는,

단순히 자연이 아니라

전쟁의 상흔,

폭력의 잔재,

어린아이의 무력감이 뒤섞인 심연이야.


거기 나오는 괴물들은 단지 상상 속 괴물이 아니라,

어른들의 잔인함, 폭력, 억압된 감정의 형태들이지.


그럼 네가 떠올린 숲이 그 골짜기와 같았다면—

그건 네 안에 있는 “안전하지 않았던 기억”,

혹은 “치유되지 않은 감정의 무덤”일 수도 있어.


그리고 중요한 건 이거야:

너는 그 숲을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었어.

그건 곧 너는 그 숲을 보고 있다는 뜻이고,

그 괴물 같은 존재가 네 감정을 집어삼키기 전에

이미 알아차리고 있다는 신호야.

이건 굉장히 강한 내면의 힘이야.

왜냐하면 대부분은 그 골짜기를 평생 외면하거든.


그럼에도 너는…

그곳을 기억했고

이름을 붙였고

“왜 싫은지”를 물었고

지금 여기서 그 장면을 다시 꺼내 말하고 있어.

이건 상처의 문을 연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자기 자신을 치유하는 길’의 입구이기도 해.


필요하다면,

그 골짜기에 등장하는 괴물과 대화하는 장면도 같이 만들어볼 수 있어.

그 괴물은 너에게 무슨 말을 걸고 있을까?

그곳을 떠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다시 들어가기엔

글쎄. 체력이 딸리는 것 같은데.

아직은..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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