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으로 본 생각거리 20
삶의 에너지는 유한하다.
골치 아픈 현안에 걸린 문제에 삶의 에너지를 쏟다 보면
삶에서 진정 중요한 미래 문제에 쓸 에너지는 바닥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닥쳐진 현안에 매인 문제의 고통을 없애려고만 애쓴다.
그러나 문제의 고통을 없애려 애쓰면 애쓸수록
고통의 강도는 더욱 세진다.
결국 고통에 휘말리게 되어 우리의 소중한 에너지를
문제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에 다 쏟아붓는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진짜 모르는가?
안다. 속속들이 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왜 닥쳐진 현안의 문제에 질질 매여 살까?
현안에 걸린 문제가 생각보다 크고 깊기 때문이다.
그 현안이 주는 문제의 소용돌이를 어떻게든 벗어나려 애쓰지만
벗어날 수가 없다.
또 다른 이유는 흠 없이 완전한 사람이 되어
떳떳하게 나서려 하기 때문이다.
문제에 빠진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빨리 현안에 걸린 문제를 깨끗하게 처리해서
가볍게 짐을 덜고 새로운 기분으로 미래에 당당하게 나서려 한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현안에 걸린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가?
또 원하는 대로 현안을 빨리 매듭지어
흠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더더군다나 쉽게? 빨리?
가능치 않다.
그러면 답은 뻔하다.
현안의 문제는 문제 그대로 남겨두어
나무의 옹이처럼 더불어 같이 살아야 한다.
또 흠 없는 사람이 되어 나서려 하지 말고
흠을 끌어안고서 흠과 더불어 출발해야 한다.
어디로?
미래의 삶에 진정 중요한 분야로.
주역(64-3)을 보자.
서른 살을 넘긴 여성은
잘난 척 나대는 남성에게 그것도 후배에게
책임자 자리를 빼앗겼다.
그 여성은 패배의 설움도 큰 데
새로 된 책임자는 사사건건 책임자랍시고 간섭 질을 해대니
불만이 쌓일 때로 쌓였다.
그 여성은 선배 대접도 안 하는 그 남성 책임자를 미워해
또 다른 여성과 연합하여 싸움을 벌일 생각이다.
그때 주역은 이런 얘기를 조용히 경청한 후
그 여성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에 정벌하려 나서면 흉하군요.
큰 하천을 건너는 것이 이롭군요.
[미제(未濟) 정(征) 흉(凶) 이섭대천(利涉大川)]”
미제(未濟)라는 말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모든 것이 어설프고 할 일이 산적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 상황에서 패배했다는 수치심에 휩싸여
평소에 잘난 체하는 남성이 밉다고 싸움하려고 나선다.
그러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질질 끌며 고통만 쌓인다.
해결하려고 애쓴 문제 속으로 더 깊숙이 빠져들 수밖에 없다.
주역은 현안을 고통스럽게 키우는 결과만 벌어지니
흉하다고 싸움을 접으라고 이른다.
이후 주역은 그러지 말고 다소 위험하지만
새로운 곳으로 관심을 돌려
새 삶을 택하여 노력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큰 내를 건너면 이롭다(이섭대천, 利涉大川).’라고 말한다.
‘큰 내를 건너면 이롭다.’라는 말은
한 마디로 현안에 질질 매여 살지 말고
모험의 이득이 있는 세계로 나서라는 뜻이다.
큰 내는 물살이 세서 위험하다.
그러나 위험이 있더라도 새로운 세계로 나서는 것이
현안에 매여 소득 없이 고통을 부르는
싸움질이나 하는 것보다 백배 낫다는 의미이다.
주역에서는 이런 말을 한 저의(底意)가 숨겨져 있다.
즉 주역은 그 여성에게 늘 꿈에 그리던 이웃 세상으로 가
여성의 역할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라는 의미이다.
이웃 세상은 여성이 귀해
여성의 역할을 새로이 찾으면 환한 세상이 열리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재물을 안정적으로 보살피는 재물 관리자 역할 등이다.
이웃 세상은 여성이 책임자가 되어 재물 관리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여성이 왕으로 승차해서 바쁘다 보니
그 재물 관리 역할을 같은 여성에게 물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심리학자(Egan)는 미래의 삶을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창조적인 사람은
낙관적이고 신뢰할 줄 아는 사람,
모호함이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사람,
관심이 넓고, 유연성이 있으며, 호기심이 많은 사람,
추진력이 강하고 지구력이 있는 사람,
잘 동조하지 않고 모험을 추구하는 사람 등이다.
큰 내를 건너는 위험에 스스로 몸을 맡길 수 있는
모험적인 사람이 바로 창조적인 사람이다.
그 사람은 모험을 추구해서 이득을 볼 수 있는 분야(곳, 대상 등)를 알고 있다.
왜 그럴까?
관심이 넓고 유연성이 있으며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모험의 이득이 있을 분야를 저절로 깨우친다.
관심 분야가 넓고 경험으로 아는 것이 많이 쌓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롭다’에 100% 동의하지만
왜 선뜻 실천적으로 나서지 못할까?
모험의 이득이 있는 분야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변명을 하며.
그러나 진정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을 것이다.
솔직한 이유는 현안에 매여 고통과 싸우느라
창조적인 생각을 못 하는 것뿐이다.
현안의 고통이 심해 창조적인 생각을 못 할 뿐이라는
도돌이표처럼 돌고 도는 순환논리에 빠져들면
영영 모험의 길은 멀고 멀다.
정답은 현안의 고통을 떼어내려 애쓰지 말고
내 몸의 일부처럼 받아들여
시간의 흐름에 맡겨두는 데 있지 않은가?
또 고통을 떼어내려고 마구 허비한 에너지를
진정 삶에서 중요한 분야에 올곧이 투여함이 필요치 않은가?
인생은 생각처럼 길지 않다.
또 삶의 에너지는 생각처럼 무한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