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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ul 08. 2019

집 밥은 공짜가 아니다

온 가족의 역할이 모여 따스한 공기를 만든다.

집 밥의 따스함, 그리고 밥의 의미


집 밥은 따스하다.

시대가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그 온도를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현실적으로 그 따스함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라도 어느 먼 여행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거나, 삶에 지쳐 위로와 용기가 필요할 땐 기어코 '집밥'을 떠올린다. 모락모락 한 하얀 쌀밥에 어우러지는 보글보글한 찌게의 조합은 한국사람이라는 정서에 정형화된 이미지로 인박여 있다.


다이나믹 듀오의 '어머니의 된장국'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그 이미지가 잘 녹아져 있다.


냉장고엔 인스턴트식품
혀 끝에 남은 조미료 맛이
너무 지겨워
그가 간절하게 생각나는 건 바로
어어어어어어 어머니의 된장국
담백하고 맛있는 그 음식이 그리워
그때 그 식탁으로 돌아가고픈
어어어어어어 어머니의 된장국
담백하고 맛있는 그 음식이 그리워
잠깐의 생각만으로도 배고픈

- 다이나믹듀오 '어머니의 된장국' 중에서


더불어, 한국 사람은 '밥' 그 자체에 미련이 많다.

이방인이 본 조선인의 식사량 기록을 찾아보면 조선인은 소화 기관이 허락하는 한 계속 먹었고, 배고픔을 해소하기보단 포만감을 추구하며 먹는다 했다. 외국에서 온 선교사나 여행가는 조선인이 고봉으로 내어 놓은 밥에 적잖이 당황을 했다고도 적혀 있다.


'밥'에 대한 집착은 우리 일상 대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너 밥도 없을 줄 알아', '언제 밥이나 한 번 먹자', '밥은 먹고 다녀?', '식사는 하셨습니까', '저 사람 정말 밥맛 없지 않냐?', '저래서 밥은 벌어먹겠냐?', '밥 값은 해야지', '그러다 너 콩밥 먹는다',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냐?', '그게 밥 먹여줘?', '밥맛 떨어지네' 등.


이처럼, '밥'은 단순히 밥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 생각과 혼 그리고 삶의 방식을 아우르는 정서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따스한 의미를 하는 함께하는 식구,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가족이 맛보는 만찬


그런 의미에서 그 따스하고도 의미가 깊은 밥을 집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은 소중하다.

'식구(食口)'란 말은 그 의미를 잘 담아 놓는다. '한 집안에서 같이 살면서 끼니를 함께 먹는 사람', 가족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집에서 같이 살거나, 아니면 그 안에서 함께 밥을 먹는다면 결국 Family인 것이다.


하지만 따스한 집밥을 먹기 위해선 조건이 필요하다.

온 가족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누군가는 밥을 벌어와야 하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요리해야 한다. 다른 누군가는 맛있게 밥을 먹어야 하고 무럭무럭 자라나야 한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 모여 있어야 하는 건 기본이다. '집밥'은 그렇게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가족들이 먹는 하나의 만찬이다.


직장에서 어느 지친 날, 나는 퇴근길에 장을 본다.

와이프에 전화를 걸어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자고 해놓고, 메뉴에 맞는 식재료를 사 간다. 요리는 나도 참여 하긴 하지만, 주로 와이프의 몫이다. 남자라서 돈을 벌고, 여자라서 요리를 하는 게 아니다. 와이프와 나는 역할을 나누었고 서로를 존중한다. 우리 가족이 살아나아가는 생존 방식인 것이다.

나보다 가방 끈이 긴 와이프도 아이들에게 필요한 '엄마'가 되기 위해 기꺼이 경력을 중단하고, 그 역할에 합의했다. 나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밥벌이의 고단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되었다. 아이들도 저들의 역할에 충실하다. 밝고 명랑하게, 때론 속을 썩이지만 그래도 무럭무럭 자라는 그 역할을 해내는 걸 보 밥벌이의 고단함은 금세 잊힌다.




그러니, 그 따스한 집밥은 공짜가 아니다.

가족 저마다의 역할을 충실히 할 때, 서로의 역할을 존중해줄 때 가능한 것이다. 밥을 벌어오는 것, 사랑과 정성을 담아 요리를 하는 것, 그것을 먹고 힘을 내 이 세상을 멋지게 살아내야 하는 것. 존중과 배려, 감사한 마음이 어우러져 마침내 집밥은 완성되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물려줄 막대한 유산이 없다.

하지만 나는 '집밥'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물려주고 싶다. 그 '위대한 유산'은 아이들이 이 세상을 살아나가다 힘이 들 때, 무언가에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때 다시 시작할 용기를 줄거라 나는 믿는다. 각자의 바쁜 삶을 사느라, 실제로 그렇게 다 같이 모여 밥을 먹는 순간이 일 년에 몇 번 밖에 되지 않더라도 마음과 정서 그리고 생각에 뚜렷이 남아 있는 따스한 집밥의 이미지가 평생 작동하면서.


오늘도 우리 가족은 저마다의 역할에 충실하다.

그 충실함의 결과와 보상이 '집밥'이라는 것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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