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역동적으로 견뎌내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자, 우리 선수들.
이제 이 시간을 잘 견뎌내야 합니다!"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축구 결승전.
우승컵을 향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전반전과 후반전이 이미 끝난 연장전. 빗장 수비로 지공을 펼치는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전술에 엮여, 선수들은 지쳐있었다. 중계 아나운서는 예상된 사우디 아라비아의 전술이라며, 흔들리지 말고 좀 더 버틸 것을 간절하게 요구했다.
"자, 우리 선수들. 지금까지 잘해왔어요. 사우디 아라비아가 이렇게 나올 거라는 걸, 감독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이 시간을 잘 견뎌내야 합니다!"
아나운서의 좀 더 견디라는 그 말은 곧장 내 마음속에 콕 박혔다.
그 말은, 축구장 안에 있는 선수들에게 하는 말로부터 더 확장되어 오늘도 하루를 잘 버티고 견딘 사람들에게 닿지 않았을까라는 엉뚱한 희망마저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흔들린 건, '견디기는 역동적인 것'이라는 관점의 변화 때문이었다.
아나운서는 선수들에게 좀 더 견뎌낼 것을 요구했으나, 선수들의 견디기는 매우 역동적이었다. 견딘다고 해서, 버틴다고 해서 그저 서있는 게 아니고 오히려 더 사투를 벌이며 전방 압박을 하고 기회를 노렸다. 그렇게 달리고, 넘어지고, 뛰어오르는 것이 그 순간에 필요한 '견디기'였던 것이다.
견디기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역동적인 나의 선택이다!
우리 삶은 지난하다.
행복한 일은 가뭄에 콩 나듯 있고, 지리멸렬한 일상은 순탄하지가 않다. 공부를 하고, 출근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우리는 지쳐 간다. 그래서 집어 든 공감 에세이나 자기 계발서들은 하나 같이 '때려치워'라든가 '버텨라'를 이야기한다. 때려치우라는 이야기들은 통쾌하지만 내 삶을 책임져주진 않는다. 버티라는 이야기 또한 머리로는 이해가 되나 지금 이 순간을 당장 나아지게 할 답은 없다.
물론, 나는 때려치우는 것보단 견디고 버티는 것에 좀 더 의미를 두고 싶다.
삶의 경험을 볼 때, 쉽게 때려치우기보단 견디고 버티면서 얻어낸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경험을 가지고 남에게 그것을 강요할 순 없다. 때려치워서 오히려 성공한 사람들도 있고, 더 이상 버텨서는 안 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그래도 지금을 견뎌내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견뎌내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하찮게, 지겹게 여기지는 않았나 돌아보고 싶다. 어쩌면 내가 그랬기 때문일 것이고, 그래서 '역동적 견디기'가 내 마음을 후벼 팠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무언가를 견디고 버텼다면 스스로를 한 번 돌아봤으면 한다.
우리는 자주, 견디기가 매우 수동적이며 어찌할 수 없는 자의 패배적 선택이라 생각한다. 그럴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삶은 힘든 것이다. 내 맘대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을뿐더러, 세상은 나만을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나 자신마저, 나를 내동댕이쳐선 안된다.
나의 견디기를 폄하하기보단, 오히려 드높여 주는 게 나에 대한 도리가 아닐까. 우리의 견디기와 버팀이 그 얼마나 역동적이었는지, 얼마나 열심을 다한 결과인지. 그러한 순간에 우리는 얼마나 성장하고 많은 것들을 얻었는지를 적어도 나는 나에게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견디기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역동적인 나의 선택이다. 지금 내 삶이 무언가를 견뎌내고 있어 힘들거나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의 역동성에 주목해보자. 누군가 시킨 게 아닌, 나의 선택이란 걸 상기하자. 뻔하고 뻔한 이야기처럼 들려도 좋으니, 그것 하나만 해보자. 그러면 좀 더 견딜 용기가 난다.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내가 역동적으로 얻어낸 것들을 소중히 여길 수 있다.
역동적으로 잘 견디고 버텨, 마침내 연장 후반에 골을 넣어 우승컵을 들어 올린 축구 선수들.
나는 오늘도 자신의 삶을 역동적으로 견뎌내는 모든 사람들을 응원하고, 나를 포함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