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관리 차원으로 체력 단련을 받는 한 연예인이 죽을힘을 다해 러닝머신 위를 뛰고 있었다. 혹독하기로 소문난 트레이너는 옆에서 "더더더"를 외치고 있었는데, 기진맥진한 그 연예인이 뛴 시간은 5분이 채 안되었다. 그 광경을 VCR로 보고 있던 패널들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아니, 저거 뛰고 힘들다고 난리인 거야?"
손가락질하며 웃고 있는 패널들을 바라보는데,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게 뭐 그렇게 힘들다고..."라고 쉽게 이야기하는 현실에서의 모습들이 소스라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보통 '남'의 어려움을 보고는 쉽게 내뱉는 말. 우리는 그 말을 쉽게 내뱉고, 어렵게 받아들인다.
감정으로의 개입
우리는 누군가의 감정에 개입할 수 없다.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고는, 다른 사람이 느끼는 고통과 기쁨. 갖가지 감정들을 오롯이 알 수 없다. 다만 짐작할 뿐. 다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이자 오만이다. 그러니 쉽게 내뱉는다. 최근, 밖으로 나가 5분 동안 연속으로 뛰어본 적이 있는가? (예능을 다큐로 만들 생각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건 그 모습을 보고 웃은 사람 대부분은 그런 경험이 적어도 최근에는 없었을 것이다. 요전 날 5분을 연속으로 뛰어 힘든 기억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남들보다는 덜 웃었을 것이다. 그 상황에 개입하진 못해도,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공감을 할 수 있기에.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누군가 나에게 "뭐 그리 힘들다고..."란 말을 하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남들 또한 내 감정엔 개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도 그러하지 못한다. 내가 힘들다고 느껴질 때, 세상이 가차 없게 느껴지는 이유다. 내가 어려울 때, 아주 가까운 누군가 위로의 말을 건네도 그것은 그저 말일뿐. 그 시간을 견뎌내고 이겨내야 하는 건 나 자신이다.
나를 뺀 우주와, 나의 무게. 어떤 게 더 무거울까?
나를 뺀 우주와, 나의 무게.
어떤 게 더 무거울 것인가. 이것은 어떠한 공식으로 풀어낼까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다. '존재'라는 공식을 대입하면 후자가 더 무겁다.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그래서 공식도 원하는 대로 적용했다. 우주를 인식할 내가 없으면, 우주도 없는 것이니까.
세상의 중심은 나다.
'인싸'나, 항상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나르시시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모든 일들은 나의 관점으로 규정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심리학에는 '지각심리'와 '인지심리'가 있다. 우리의 오감을 통해 '지각'되는 외부 자극, 그리고 지각된 감각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결정하는 '인지' 과정. 어떠한 자극은 우리의 신경세포를 거쳐 각자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판단 근거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또 그에 따라 반응이 달라진다. 햇살이 쨍한 날, 기분이 좋으면 세상이 아름답지만 이별한 사람에게 그 날씨는 곤욕인 것처럼.
그러하니, '나만 힘들다'란 느낌은 당연한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크게 다친 것보다, 내 손톱 아래 가시가 더 큰일이다. 다른 사람의 인생은 쉽사리 걱정 없어 보이지만, 내 인생은 문제 투성이다. 다들 잘 먹고 잘 사는데, 나만 힘들어하고 있다는 느낌적인 느낌. 띄엄띄엄 맞이하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은 재빨리 지나가고 그 안의 문제가 보일 리 없다.
나만 힘들다고 풀썩 주저앉을 필요 없다.
인생은 나만 힘든 게 맞다.
나만이 내 감정에 개입할 수 있으므로.
나는 나를 뺀 우주보다 더 무거운 존재이므로.
더불어, 세상의 순리를 볼 때, 다른 사람들은 기쁜 일은 함께 적극적으로 나누려 하지만, 힘든 일엔 그보단 소극적이라는 걸 항상 상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