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가 위험을 느끼면서 자신의 힘으로 감당해 낼 수 있는지 아닌지를 저울질하여 자신의 무력을 자인할 때 나타나는 상태
- 프로이트 -
과연 그렇다.
프로이트는 심리학의 대가답게 누구나 느끼는 '불안'을 명쾌하게 정의했다. 프로이트는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없애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게 왜 생기고 어떠한 것인지를 규정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짐은 덜어준 것이라 말하고 싶다.
'불안'은 말 그대로 안심이 되지 않은 심리적인 상태나 감정을 뜻한다.
사람의 감정이 처음 발달하게 된 동기는 '공포'였다. 생존을 위해서다. 사람은 그 '공포'를 감지하고 최소화하며 생존 본능을 극대화했다. '안정되지 않은 것'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공포'와 '불안'은 꽤 닮아 있다. 하지만 '불안'은 신체적이나 정신적으로 분명한 위협'을 인지하였을 때 나타나는 '공포'와는 다르다. 무서워하는 대상이 분명하지 않고 공포에 비해서는 대상을 두려워하는 정도도 미약하기 때문이다. 즉, '불안'은 어찌 보면 '만성화된 공포'라 할 수 있다. 아무것도 닥치지 않았는데도 무언가 불안정하다. 막연한,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그것이 바로 '불안'인 것이다.
사람은 상상을 해서 비겁해지는 거래!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달수는 최민식의 이를 뽑으려 한다.
비틀어 당긴 연장엔 이가 없다. 하지만, 최민식은 이미 이가 빠진 사람처럼 혼비백산한 상태다.
이를 보고 오달수가 말한다.
"사람은 상상을 해서 비겁해지는 거래!"
불안이 그렇다.
우리는 '불안'을 상상한다. 아니, 불안 자체가 의식적이면서도 무의식적인 '상상'이다. 다가오지 않았는데도 요동한다.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걱정을 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란 영화가 있는데, 불안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잘 표현해 준 제목이다. 상상 속엔 온갖 괴물이 있고, 사고가 있으며, 불행이 있고, 슬픔이 있다. 그것이 눈 앞에 현실이 될까 오늘 하루하루를, 마치 외줄 타기라도 하는 것처럼 우리는 살고 있다.
긍정적인 상상보다는, 좋지 않은 것들에 대한 상상이 항상 더 뚜렷하다는 게 신에 대한 나의 불만이다.
불안을 대하는 자세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불안'은 나에 대한 걱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떨까, 그렇게 되지 않으면 어쩔까. 미리 상상하여 최악의 상황은 면하려는 생존 본능. 공포심은 언뜻 들어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야생에서 맹수를 만나 한달음에 도망치게 해 준 건 다름 아닌 '공포'였다.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목숨을 유지하고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렇게 쌓인 공포심이 데이터베이스화 되어, 맹수가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맹수와 비슷한 무언가를 마주할까 느끼는 불안. 우리는 언제라도 나를 지킬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네 사회는 '실수'나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다.
우리네 시대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덜 불행하기 위해 애쓰는 형국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은 내 지식과 정서 밖의 일이므로 함구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 모두 이러한 사회와 시대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불안하고, 또 불안할 수밖에.
마음이 불안정하다면, 그것에 서글퍼하지 말고 무엇이 나를 흔드는가를 마주해야 한다.
흔들리는 마음은 결국 나를 지키기 위한 신호다. 그것은 분명 미래 또는 다가오지 않은 것들에 대한 것이다. 지금 내가 '최악'이 될까 봐 불안해하는 상황은 무엇인가. 실수하지 않으려, 실패하지 않으려, 덜 불행하려 발버둥 치는 와중에 우리는 더 흔들린다.
불안은 내 편이라 생각하자.
차분하게 불안과 마주 앉아 차 한잔을 하자.
나에게 어떠한 것을 알려 주러 왔는지, 내가 하고 있는 상상은 무엇인지.
알고 보면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불안'이라는 친구가, 이제야 자신을 만나주었다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이상에 대해 자세히 귀띔을 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