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장애물을 뛰어넘지 못한 사람에겐 상처가 되는 말 일 수 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누구나 뛰어넘을 수 있다면 그건 장애물이 아니다. 장애물은 걸려 넘어지라고 만들어 놓은 게 맞다. 내가 그것을 만들었든, 누군가 그것을 만들었든 간에 장애물은 장애물이니까.
중요한 건, 장애물에 대한 인식이다.
그것은 왜 생겼으며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자세히 보면 장애물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만든 것이라면 치우면 되고, 세상이 만들어 놓은 것이라면 그 이유를 알고자 하는 게 우선이다. 이유 없는 장애물은 없다. 못하게 하려거나, 안 하게 하는 장애물은 우리 마음은 물론 외부의 세상에 흥건하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당장, 오늘 밖으로 나가 30분을 뛰려고 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럴 가능성이 더 높은데) 만약 오늘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나에게 주어진 장애물은 뭐였을까? 그 장애물은 왜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한 번 곱씹어보면 깨달음이 많을 것이다.
글쓰기를 멈추게 하는 것들
세상엔 '되는 이유'와 '안 되는 이유' 중 어느 것이 더 많을까?
당연히 후자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안 되는 것들' 중에서 '되는 것들'이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되는 것들'이 '안 되는 것들'에 가려져 있는 경우도 많다. 해보면 되지만, 시작조차 하지 않거나 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꾸준하게 하는 것에 대해 '안 되는 이유'는 무럭무럭 자라난다.
글쓰기가 그렇다. 꾸준하게 하고 싶은데 다가오는 장애물이 너무 많다.
하지만, '왜'를 떠올려 장애물을 인식하면 하나하나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
때론, 그것을 피해 가는 것도 방법이다. 장애물인 줄 알았더니 아닌 것도 있을 수 있으니.
해서, 글쓰기를 멈추게 하는 것들에 대해 함께 생각해 봤음 한다.
1. 첫째, 자기 검열
누군가를 의식할 대 우리는 자기 검열에 들어간다.
물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내가 혹시 남에게 피해를 주진 않는지, 내가 예의에 어긋나는 의상이나 행동을 하는 건 아닌지. 하지만, 그건 자발적인 인식이며 반성이다. '검열'은 이와 좀 다른데, 획일적인 잣대로 무언가를 통제하고 제한하는 것으로 '자기 검열'은 나를 끝도 없이 억누르려는 어두운 마음이다.
그런데, 글쓰기를 시작하거나 이어나가려 할 때 우리는 꽤 많은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문장이 세련되었는지, 이 단어가 좀 있어 보일지, 누군가 내 글을 읽었을 때 많이 읽어줄 것이지, 이러한 표현을 쓰는 게 더 인기가 많을 것인지 아닌지 등. 자기반성이나 객관적 고찰을 넘어, 내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을 제한하고 느낀 것을 고스란하게 전하는 것을 통제하는 '자기 검열'이 고개를 들면 그 글은 오염된다.
스스로를 돌아볼 때, '자기 검열'이 들어차는 때는 겉멋이 들었을 때였다.
책 한 권 냈다고 으스대며 쓴 글들엔 잔뜩 힘이 들어가 있고, 중요한 요소들은 잔뜩 빠져 있었다. 더불어, 그 당시 썼던 글은 아직도 책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검열 없이 써 내려간 글들이 연달아 책으로 나왔다.
그러니, 나는 '자기 검열' 얼마나 무섭고 헛된 것인지를 잘 안다.
글쓰기는 나의 것이다. 그리고 나의 진실된 깨달음은, 굳이 치장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2. 둘째, '나'가 없는 목표
내가 글쓰기를 다짐했을 때, 가장 잘한 것이 있다.
목표를 두지 않은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괴롭히는데 일가견이 있는데, 가장 쉬운 방법이 목표를 높게 잡고는 그것을 달성하지 못하는 나를 탓하는 것이다. 그 효과는 매우 커서, 나는 그러한 나 자신에 항상 주눅 들어 살아왔다. 그 방법이 먹힐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그 목표에 '나'는 없다는 것이다. 즉, 나를 고려하지 않은 목표, 나와 협의하지 않은 목표는 나를 가장 쉽게 괴롭힐 수 있는 고문방법이다.
그러할 바엔, 아예 목표를 정하지 않는 게 낫다.
나부터 챙겨야 한다. 글을 쓰는 건 나다. 하루에 글을 몇 개 써내야 한다든가, 언제까지 책을 내야지 하는 다짐과 그렇지 못하면 너는 글을 쓸 자격이 없다는 목표는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목표 없이 써 내려가는 글은 마음이 편하다.
내려놓은 마음이 주는 안정감과 에너지는 생각 이상이다. 편한 마음에서 나오는 글이 더 양질이다. 그리고 쥐어짜지 않은, 나를 관통하여 나온 글에 진심이 실린다. 진심이 실리면, 누군가에게 영향력이 되는 기적을 경험할 수도 있다. 못된 방법으로 나를 괴롭혀 나온 글이 누군가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내'가 없는 목표는 글쓰기를 멈추게 하고, '내'가 있는 무(無)목표의 글쓰기는 계속될 수 있다!
3. 셋째, 간헐적 글쓰기에 대한 자책
일 년 중, 글 하나만 썼더라도 나는 누군가에게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다.
글쓰기는 꾸준한 게 좋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밀려 글쓰기 자체를 포기하면 안 된다. 멈춘 글쓰기 앞에 꾸준하고 안 하고는 의미가 없다.
간헐적 단식인지, 간헐적 폭식인지에 대한 설왕설래가 많다.
글쓰기는 어떨까. 가끔 쓰든, 몰아서 쓰든. 조금씩 자주 쓰든. 건강을 위해선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답은 없는 것이다.
간헐적으로 써도 좋다.
가끔 써도 괜찮다.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 뛸 필요 없다. 천천히 걸어도 좋으니 멈추거나 뒷걸음만 치지 않으면 된다. 꾸준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간헐적 글쓰기에 대한 자책을 해선 안된다. 그건,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다. 글쓰기의 가장 큰 목적은 내 마음과 정신 건강을 위한 것인데, 글쓰기를 속상해하는 일이 벌어져선 안된다.
4. 넷째, 책을 내야 한다는 강박
연애의 완성이 결혼이 아니듯, 글쓰기의 완성도 책이 아니다.
사랑이고 뭐고 결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조차 시작하지 않은 채, 내 책 한 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해서, 글쓰기를 시작한 초기부터 조급해진다. 당장 책이 나오지 않으니, 글쓰기를 멈춰야 할까를 고민한다.
항상 강조하듯, 우리는 '책'이 아니라 '글'을 써야 한다.
해서 나는 '책 쓰기'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떻게'에 대한 강박이다. '글쓰기'로 선회해야 한다.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글쓰기'가 본질이다. 글을 쓰다 보면, 글이 모여 책이 되는 게 순리다. '어떻게'애 대한 몰두, 즉 책을 내야 한다는 강박은 당연한 것을 잊게 만드는 주범이다. 어쩌다 책을 목표로 해서 한 권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다음은 기약할 수 없다.
다시, 책이 아닌 글을 써야 한다.
차곡차곡 쌓이는 글들은 언젠간 나에게 답장을 한다. 그것은 내 생각의 모음이며, 세계관의 함축이므로 그 어떤 기회로도 되살아날 것을 나는 확신한다.
5. 다섯째, 있어 보여야 한다는 '있어빌리티'의 오류
글쓰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쉽지도 않다. 어렵지 않은 건 그저 내 이야기를 쓰면 되는데, 쉽지 않은 이유는 뭔가 있어 보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평범하고, 글재주가 없는데 내가 뭘 쓴다고 누가 봐주기나 할까?
'있어빌리티'가 없는 내 글을 도저히 어딘가에 올릴 자신이 없다.
식사 전 음식 사진 하나를 찍더라도 앵글에 들어오는 곳을 있어 보이게 만드느라 정신이 없는 우리다. 뭔가 있어 보여야 한다는 생각의 오류는 글쓰기를 시작하는 우리들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내용보다는 겉 치중에 공을 들일 때, 글쓰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글 속의 의미보다 배경 이미지에 신경을 더 쓰거나, 화려한 인터페이스로 글의 부족함을 가리려 할 때 그렇다.
글은 '있어빌리티'나 '없어빌리티'를 초월한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 의도와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일 때 '있어빌리티'는 가장 극에 달한다.
글쓰기를 멈추게 하는 장애물들.
돌아보면, 대부분 내가 만든 장애물들이 많다.
결국, 글쓰기는 나와의 싸움이자 경쟁이며 나를 위한 동맹이자 응원이란 걸 다시 한번 더 깨닫는다.
필요한 장애물은 뛰어넘으며 실력을 늘리고,
불필요하고 과도한 그러니까 나를 괴롭히려 만든 스스로의 장애물은 없애거나 피해 가는 지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