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일이나 사물이 서로 연관되어 이루는 줄거리 2. 서로 연관되어 있는 핏줄의 계통
- 어학사전 -
그림에서 보이는 것은?
이 그림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아마 대부분은 삼각형을 생각해낼 것이다. 그러나 삼각형은 없다. 없는 삼각형을 우리는 왜 만들어 내는가? 이를 두고 '맥락적 사고'라 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불충분한 정보를 끼워 맞추려는 심리적 본성이 있다.
길을 가다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나에게 인상을 쓰고 갔다고 생각해 보자.
하루 종일 기분이 나쁘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분이 좋지 않고, 다른 일로 잊으려 해도 그 상황이 잊히지가 않는다. 왜 그럴까? 설명이 안되기 때문이다. 맥락적 사고가 멈춰버리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내 가방이 그 사람을 쳤다거나, 나에게 인상 쓴 게 아니라 다른 일로 인상 쓴 그 사람의 얼굴을 우연히 내가 본 것이라는 '맥락'이 밝혀지면 우리는 그 일을 수용할 수 있다.
즉, '맥락(Context)'은 '어떤 사물이나 대상 등이 서로 연결되어 잇는 관계'를 말하고 이는 우리 삶에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고맥락(High-context) 문화와 저맥락(Low-context)문화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T.Hall)은 의사소통 이론을 정리하며 '고맥락'문화와 '저맥락'문화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고맥락 문화는 같은 문화권 내에서 암묵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부분이 많고 비언어적이고 상황 중심적인 메시지의 비중이 높다. 반면 저맥락 문화는 모든 전달되어야 할 메시지들이 언어 또는 서면으로 확실히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한다. 에드워드 홀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고맥락 문화는 한국, 일본, 중국, 아랍, 남유럽 및 라틴아메리카에서 강하고 저맥락 문화는 미국, 독일, 영국, 네덜란드에서 강하게 보인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업무를 나눌 때 한국, 일본의 경우 굳이 명시되어 있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일의 범위가 넓다. 정수기에 물을 갈아 끼운다던가, 전체 자료를 취합한다던가 한 조직 내에서 돌아가며 총무역할을 하는 것 등이 그렇다. 그러나 저맥락 문화에서는 명시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바나나와 원숭이 그리고 사자를 분류하는 방식에서도 우리는 그 둘을 구분할 수 있다.
이 중 관련 없는 한 가지를 고른다면? 고맥락사회인 우리나라 사람은 대부분 사자를 제외한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먹는다는 맥락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맥락사회의 서양에서는 원숭이와 사자는 동물이므로 바나나를 제외하는 확률이 높다. 맥락보다는 '종(species)'이라는 사실에 근거한 사고다.
그러나 '고맥락'과 '저맥락'은 이분법적으로 나눌 순 없다.
상황에 따라 말 그대로 '맥락'에 따라 그것은 바뀔 수 있다. 서양은 저맥락을 일관할 것 같지만 서양미술사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상파'의 출현은 '사실주의'라는 저맥락에 대한 반발이었다. 있는 그대로를 그리지 않음으로써 생각하고 상상할 여지를 남긴 것이다. 즉, 관객들은 각자의 '맥락'을 발휘하여 그림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감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또한 맥락적 사고뿐만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사고방식도 많이 발달하게 되었다. 요즘 직장에서 업무 지시를 받아들 때 새로운 세대는 명시되지 않은 걸 암묵적으로 수행하지 않거나, 이의 제기를 확실히 한다.
결론적으로 맥락적 사고는 문화와 사회 그리고 사람마다의 성격에 걸쳐 광범위하게 혼합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맥락'에 맞다.
'맥락적 사고'가 중요한 이유
맥락적 사고를 일상 속에서 발휘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인데 이유는 아래와 같다.
첫째, 맥락적 사고는 삶에 '재미'를 준다.
세계 최초의 영화는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한 시네마토그래프를 통해 나왔다.
'열차의 도착'이라는 그 작품은 말 그대로 열차가 도착하는 모습을 찍은 장면이었다. 정지한 모습을 넘어 열차가 들어오는 역동적인 모습을 본 관객들은 요동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내 지루함을 느꼈다. 자신이 보는 일상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르주 멜리에스는 여기에 '재미'를 부여했다.
바로 '편집'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것이다. 화면 씬을 끊고 다른 것으로 대체함으로써 마술사가 한 여인을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사라진 귀부인'이란 제목의 그 영화는 사람들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지금 보면 편집의 흔적이 선명하여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당시 사람들은 놀라고 또 놀랐다.
'사라진 귀부인'이란 영화는 '편집'을 통해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었고, 이 재미는 결국 중간의 정보가 사라진 '맥락적 사고'에서 온 것이다.
둘째, 맥락적 사고는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앞서 언급했던 우리에게 인상을 흘기고 갔던 사람을 떠올려 보자.
하루 종일 기분이 나쁘다가 결국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나도 모르게 내 몸이 닿았던 건가? 내가 먼저 인상 쓴 건 아닐까? 나랑 관계없는 표정이었을까?
맥락이 이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없는 삼각형을 만들어내듯이 맥락을 완성하려 한다.
그러면 그 맥락은 하나의 '의미'가 되어 돌아올 수 있다. 즉, 설명이 안 되는 그 상황에서 원인 없는 결과는 없으므로 나를 돌아봐서라도 그 맥락을 찾아 내려한다. 그것은 결국 자기반성과 역지사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친한 친구와 갈등이 있었거나, 직장에서 기분 좋지 않은 일이 있었거나.
인생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나에게 다가올 때, 맥락적 사고를 하며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셋째, 맥락적 사고는 '나를 지키는 힘'이 된다.
종합적으로 볼 때, 맥락적 사고는 '눈치'로 해석될 수도 있다.
어느 한 조직이나 집단에 속할 때 우리는 '눈치'가 빨라야 한다. 그것은 생존과 관계된 일이다. 건전한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에겐 탁월한 맥락적 지성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데, 이게 바로 '눈치'다. 상황에 맞추어, 사람에 맞추어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것.
남의 눈치를 보며 벌벌 떠는 그러니까 비굴한 의미에서의 눈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상황에 맞게 자신을 지키며, 자신의 소신을 조금은 휠지언정 부러뜨리지는 않고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지혜.
그것이 곧 나를 지키는 맥락적 사고인 것이다.
주어진 '맥락'과 내가 만드는 '맥락'
우리는 때로 어떤 상황에 있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우둔함을 가졌다.
꼭 어떤 상황을 닥쳐야 그 안에서 의미를 찾거나 변화를 꾀한다. 예를 들어, 군대를 가면 그러지 않았던 사람이 많이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머니의 은혜를 깨닫고 눈물을 흘리거나, 치약으로 바닥과 침상을 구석구석 닦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샤워를 하는 깨끗한 모습. 휴가를 나와서도 어머니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은 더 하고, 자신의 방마저 치약으로 구석구석 닦는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제대하면 그러한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예전의 자신으로 회귀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맥락'은 또한 '주위 환경/상황'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어진 맥락에서만 변화할 것인가? 주어진 맥락에서라도 변화를 꾀한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지만, 변화를 위해서 스스로 맥락을 바꿔 보는 건 어떨까?
자기계발서나 철학, 인문학에서 말하는 것들이 '관점'에 관한 것임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또 그 이야기야? 관점을 바꾸라고? 태도를 바꾸라고? 지겹다 이제 그만!"이라는 반응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고 맥락이 바뀌면 사람들은 그제야, "아, 이 말이 정말 마음 깊이 다가오네..."라며 깨닫는다.
결국, 자기계발서나 철학, 인문학에서 말하는 것들은 어떤 상황이 오기 전에 스스로 '맥락'을 만들어 보라 권유하는 것이다.
주어진 맥락이든 내가 만든 맥락이든.
어찌 되었건 맥락은 삶의 '재미'가 되고 '의미'가 되며, 결국 '나를 지키는 힘'이 된다는 걸 믿고 나아가면 분명 나를 지킬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