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질문을 끊임없이 하려 한다. 딱, 100세까지만이라도!
우리의 정서에 각인된
사회적 기준
생각해본 적 있는가.
왜 이 시대의 사회생활 시작과 결혼이 늦어지고, 조금 느려도 괜찮다거나 열심히 사는 게 다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봇물처럼 나오고 있는지.
이 현상의 이면엔 사회적 역설이 있다.
즉, 사회생활은 빨리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결혼도 빨리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생각. 느려선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없고 누구보다 빨라야 한다는 정서. 열심히 살지 않으면 뭔가 죄를 짓고 있다는 관념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럴 필요 없다고, 나는 그러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만, 내면 깊은 곳엔 누구보다 빨라야 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무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무의식은 삶의 기준이 되고, 기준을 기점으로 삶의 속도와 열심은 평가된다. 기준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덜 할 뿐이지, 그 기준은 매우 확고하다. 새로운 세대도 이러한 기준에서 자유로워 보이지만, 결국 먹고사는 핵심 과제가 삶의 중심이 되면 생각은 달라진다. 기성세대로의 편입은 부지불식간이다. '신세대'라는 말은 '기성세대'가 있기에 가능한 개념이다. 그리고 그 어떠한 세대든 먹고사는 문제, 즉 '생존'이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과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무의식 중에 있는 기준은 바로 이 생존과 관련이 깊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만든 공통된 가치가 바로 '사회적 기준'이기 때문이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재까지 기록된 최고 고령자는 122년 164일을 살고 간 프랑스의 장 칼망(1875~1997) 할머니다.
우리나라 남녀 평균 수명은 2019년 기준 80대 초반이다. 1960년대의 평균 수명이 50대 초반이었으니, 무려 30년의 평균 수명이 상승했다.
과연 인간의 수명은 어느 정도까지 늘어날 것인가?
이에 텍사스 대학 오스태드 교수와 일리노이대학의 올샨스키 교수가 세기의 내기를 했다. 오스태드 교수가 2000년 발표한 논문에서 2150년까지 인간 최고 수명이 150세에 이를 것이라고 했고, 올샨스키 교수는 신이 개입하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다고 못 박았다. 그 둘은 각자 150달러를 내서 150년간 주식 시장에 묻어두기로 했다. 예상 추정액은 6천억 원이고 그 후손들 중 한 편이 이 내기의 수혜자가 된다.
이 내기에 대한 결과를 우리가 알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평균 수명이 계속해서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숙명이 죽는 것이라 해도, 100세 시대에 가까워져가고 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젠 새로운 나이 계산법도 등장했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에서 85세 인구 비중이 정확히 50년 전, 85세에 0.8을 곱한 68세 이상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재 자신의 나이에 0.8을 곱한 숫자가 요즘 실생활에서의 진짜(?) 자기 나이란 이야기다. K-리그 30대 선수 비중은 20년 전의 2배가 넘고, 결혼 연령은 20대 초중반에서 19년 현재 약 32세(남자 33.37세, 여자 30.59세)가 되었다.
내 나이를 봐도 그렇다.
성장 가도를 달리던 대한민국의 1980~90년대 기준으로 보면 내 나이는 벌써 임원이 되고도 남을 나이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나와 같은 실무자가 차고 넘친다. 그 기준으로 보면 우리 아이들도 (초등학생이 아닌) 이미 대학생 이상이 되었어야 한다. 각자의 부모님께 언제 결혼하셨는지, 우리를 언제 낳으셨는지 물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지금 각자 나이에 0.8을 곱해보거나.
흥미로운 건, 이렇게 나이에 0.8을 곱해보는 것도 위에서 언급한 '사회적 기준'으로의 회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의 힘은 나이에 대한 개념을 바꿀 만큼 강력하다.
100세라는 이상과
50세에 맞춰진 기준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관념을 사로잡고 있는 그 기준은 평균 수명 50~60세에 맞춰진 것이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고, 졸업해서 빨리 직장 잡고, 빨리 결혼해서 빨리 아이를 낳는 것. 또는 이른 나이에 고시를 패스하여 입신양명하거나. 그래야 그 짧은 50~60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었다. 성공방식이 강력하게 자리 잡은 이유다.
그 옛날 남자를 기준으로 보면, 군대를 다녀와 20대 중후반엔 취업을 했고, 30년을 일하고 은퇴하면 약 10년을 좀 넘게 산 것이다. 그러니 매 순간을 악착같이 살아야 했고, 결혼을 빨리해야 손주라도 보고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우리나라 경제 변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모든 것이 성장하던 시대의 일꾼이었으므로, 달리고 달리는 게 당연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그 시대의 기준은 우리네 정서에 깊이 인박여 있는데,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어 100세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제 취업은 만만하지 않고 30세가 다 되어야 사회생활이 시작된다. 현재 정년은 2016년 기준 60세. 최근 정부가 65세로 의 변경을 꾀하고 있는 걸 감안하더라도 현실적으론 30년 일하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은퇴를 하고 나서 40년, 그러니까 일해온 시간보다 더 긴 세월을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과연 우리의 삶은 어떻게 흘러가고,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마이 사이더'의 정신이 필요한 때
'인싸(인사이더)'와 '아싸(아웃사이더)'로 양분되는 시대다.
그런데 반가운 개념이 새로 떠오르고 있다. '마싸(마이 사이더)'가 그것이다. 말 그대로 어디에 속하기보단 내 갈 길 가겠단 지향점이자 삶의 철학이다. 이것을 가지고 있다면 '사회적 기준'에서 일정 부분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기준'을 무시해선 안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증거다. 그 기준을 영영 벗어나서는 생존하기가 어렵다. 그 기준의 이유와 형태, 목적과 진정한 뜻을 곱씹고 나에게 맞게 변화를 시켜야 한다. 더불어, 그 기준의 속도에 집착하거나 휘둘리지 않고 내 갈 길을 갈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것이 바로 '마이 사이더'의 삶이라 생각한다.
'마이 사이더'의 특성과 자질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마이 사이더'의 특성과 자질은 다음과 같다.
현대 사회는 부의 개념이 고착화되었다.
부동산과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시대가 급변하면서 긍정적인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즉, 콘텐츠가 돈이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유튜브는 물론 자신의 재능을 나누고 파는 플랫폼의 등장까지. 그리고 개인의 경험을 잘 표현하고 전달해내기만 한다면 누구나 작가가 되는 시대다.
콘텐츠는 공장에서 찍어내지 않는다.
그리고, 부동산처럼 한정적이지 않다. 즉, 자신만의 콘텐츠를 가진 사람은 저 자신이 '생산수단'이 되는 것이다.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있다. 돈의 규모와 액수를 떠나, 무언가를 생산해낸다는 것은 꽤 의미 있는 일이다. 실제로 돈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은퇴 후 (일한 시간보다 더 길어진) 제2의 삶을 준비할 수 있는 자기 계발이 되기도 한다.
즉, 자신만의 콘텐츠를 갖는다는 것은 100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또 다른 생존법인 것이다.
자신만의 콘텐츠를 확고히 하려면 배움이 있어야 한다.
기성세대에게 배움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었다. 스승과 제자는 나이라는 추상적이면서도 물리적 법칙을 거슬러선 안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엔 나이의 많고 적음은 큰 문제가 아니다.
20대 최연소 임원은 물론, 10대 CEO까지. 예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젠 생존을 위해선 배움을 위에서 아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 그리고 양 옆으로도 온다는 것을 깨우쳐야 한다. 배움은 사방팔방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다. 나이와 직급을 생각해서 그 배움의 방향들을 제한하거나, 무시한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이러한 차원에서 나이를 불문하고 나에게 배움을 주는 사람을 나는 '인사이트 메이트'라고 칭한다.
나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 나의 콘텐츠를 발굴해주고 전해주는 사람. 도전과 성취를 자극하는 사람 등. 나보다 나이가 적은 분들에게 말을 함부로 놓지 않는 이유다. 더불어, 나이 어린 사람이 말하더라도 귀담아듣고, 모르는 것은 스스럼없이 묻는다.
인사이트 메이트로부터 오는 배움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예전의 기준으로 살다 보니 우린 자주 번아웃이 된다.
즉, 번아웃이 자주 온다는 것은 시대는 바뀌었는데 예전의 기준에 우리 자신을 맞추려 한다는 것이다. 그게 나쁜 건 아니다. 열심히 사는 것은 인간 본연의 가치이고, 열심히 하지 않아서 오는 후회나 마음의 불편함은 오롯이 자신이 지어야 하는 짐이기에 쉽사리 열심히 살지 말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열심의 양과 속도가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고, 그 원인이 맞지 않는 기준에 욱여넣을 때 발생하는 게 아닐까 돌아보자는 것이다.
그럴 땐 삶의 재미를 찾아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게 살아낼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 위에서 언급한 나만의 콘텐츠를 발굴하는 것도 좋고, 해보지 않은 다른 취미를 배우는 것도 좋다. 열심히만 사느라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것들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재미를 누군가와 나눌 때, 비로소 삶의 활력이 되고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즉, 재미의 사회적 가치를 묻는다면 더 큰 재미가 된다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재미는 글을 쓰고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내 글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글을 기반으로 한 강의가 한 사람에게라도 더 동기부여가 되길 바라며 나는 나의 재미를 이어 간다.
'선한 영향력을 나누는 생산자의 삶' 그 자체가 나에겐 즐거움인 것이다.
인문학적 질문 없인 삶이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다. 나는 누구고, 왜 살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고,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질문을 할 때 우린 살아 있음을 자각하고 느끼게 된다.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동안 얼마만큼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양'이 아닌 '질'이 채워질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100세 시대는 이미 도래했고, 우리 인생 2막은 더 길어질 것이며, 50~60세에 정립된 기준은 그러한 우리를 계속해서 괴롭힐 것이다.
그래서 그 기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 기준의 본질은 인정하되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페이스를 어떻게 이어갈지를 고민할 때가 되었다.
나만의 콘텐츠와 인사이트 메이트, 그리고 삶의 재미를 알고 그 가치를 나누려는 '마이 사이더'가 되자고 마음먹는다.
그래서 난, 나에게 인문학적 질문을 끊임없이 하려 한다.
딱 100세까지만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