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
개인이나 사회 집단의 사상, 행동 따위를 이끄는 관념이나 신념의 체계 - 어학 사전 -
사람은 '개념'의 노예다.
인지적 효율화를 위해, 소통의 간결함을 위해 우리는 무언가를 개념화하는데 여념이 없다.
가장 쉬운 예가 이름을 짓는 것이다.
"그거 뭐더라, 네 바퀴가 달리고 자동으로 굴러가는 그거 있잖아."
"아, '자동차' 말하는 거야?"
이처럼 '자동차'는 개념화된 명칭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자동차의 전체 의미를 담지 못한다. 누군가는 자동차를 이동수단으로 떠올리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부의 상징이라 말할 것이다. 누군가는 자동차 바퀴를 먼저 생각해내고, 다른 이는 디자인이란 요소를 강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할 수도 없는 다양한 이미지에서 최대공약수를 뽑아내야만 우리는 소통할 수 있기에, '자동차'는 결국 '이름을 붙여 만든 어떤 개념'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런데, 이름이 붙여진 개념은 기준, 즉 이데올로기가 된다.
더불어, 그 이데올로기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회적 압력이 된다.
자동차가 있느냐 없느냐.
비싼 차냐 아니냐, 경차냐 대형 세단이냐.
세단을 타니 점잖고, SUV를 타니 활동적이구나.
'결혼'도 마찬가지다.
결혼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성인이 된 어느 즈음에 사랑하는 사람과 법적으로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사는 것을 말한다. 사회적 합의다. 즉, 기준은 성립되고, 압력은 발동한다.
결혼을 했느냐 안 했느냐.
결혼할 때가 되었지 않느냐.
이혼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스타그램은
이미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인스타그램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것은 어떤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인스타그램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 부류를 나누는 강력한 기준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그것의 강력함은 나 자신을 보고도 알 수 있다.
허세와 거짓, 진심이 없고 절망이 없는 인생의 낭비라 생각했던 그 인스타그램을 나도 시작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잘하기 위해 공부까지 하고 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일흔이 넘으신 어머니께서 스마트폰을 사달라고 하셨을 때, 난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2G 폰이면 충분할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물론, 어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이젠 스마트폰 없이 어머니들의 세계에선 도태되는 현실이 도래한 것이다. 카카오톡과 유튜브를 하지 않으면 관계의 고리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 세상.
이처럼, 나 또한 인스타그램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든 것이다.
책을 출간했기에 더 많은 홍보를 해야 했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교류도 필요했다.
즉, 개인 브랜딩의 시대이므로 그 어떠한 흔적이 있어야 세상과의 소통이 가능하며, 내가 생산해낸 콘텐츠를 유통시킬 수 있는 필수적인 수단으로 '재개념화'가 된 것이다.
인문학적 고찰은 이래서 중요하다.
'개념'은 고정된 듯 하지만 유동적이다. 내가 얼마나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하는가에 따라 그것은 확장되고 다시 성립된다.
그러니까, 개념이 고정되었다고 생각하면 그것에 휘둘릴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질문을 던져 그 본질에 다가가려 할 때 우리는 개념을 다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남들이 하니 인스타그램을 하는 것과, 왜 인스타그램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하고 하는 것의 차이는 비교할 수가 없다.
개가 꼬리를 흔들 것인가, 아니면 꼬리가 개를 흔들 것인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이데올로기는 어쩌면 사람들이 만든 허상이다.
그러나, 그것에 휘둘리는 우리를 볼 때 그것은 더 이상 허상이 아니다.
허상에 흔들리는 실체라면, 그것을 실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반대로, 실체를 흔드는 허상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실체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문학은 시공간을 초월한다.
왜냐하면 모든 시공간 속에 사람들이 있고, 마음과 욕망 그리고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습득해야 할 지식이나 교양이 아니라, 사람을 공부하는 것이라는 그 명료한 의미를 다시 한번 더 떠올릴 때다. 물론, 이 의미 또한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유연한 마음은 필수다. 이데올로기에 갇히면 안 되니까.
그래서일까.
영화 '매트릭스'에서 동자승이 네오에게 숟가락 휘는 방법을 알려주는 장면이 불현듯 떠오른다.
개념을 무(無)에서 다시 바라보는 시각을 깨우쳐 주며.
"숟가락을 휘게 하려고 하지 말아요. 그건 불가능해요. 그 대신 진실을 인식하려 해 보세요."
"무슨 진실?"
"숟가락이 없다는 진실이요."
[저서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