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옆에서 '가요무대'란 프로그램을 시청하곤 했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턱시도나 드레스를 입고 노래를 부르곤 하셨는데, 그 멜로디와 가사가 어찌나 구슬프던지 그 어렸던 내 심금도 울릴 정도였다. 그러다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지금의 가수들. 그러니까 90년대를 휘젓는 이 가수들의 미래는 어떨까. 나이가 들면 가요무대에 나와 구슬픈 노래를 부를까? 나이가 들었으니, 턱시도나 드레스를 입고 제자리에 서서 노래를 부를까?
1960년부터 1990년.
1990년부터 2020년 지금. 같은 30년이 지났는데 그 차이는 참으로 놀랍다. 평균 수명 50~60세였던 그때의 가요무대와 평균수명 80 이상, 더 나아가 100세를 바라보는 지금의 가요무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오늘날 우리는 30년 전 활동하던 가수를 소환해내고, 그들은 전성기 때의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의상부터 격렬한 춤까지. 오히려 활동하던 그때보다 인기가 더 많아진 스타가 생기는 기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
기성세대는 향수를 떠올리고, 새로운 세대는 90년대 감성을 새롭게 받아들이고.
바야흐로, 우리에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가요무대'가 열린 것이다.
'레트로'와 '뉴트로'의 공존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용어가 있다.
바로 '레트로'와 '뉴트로'다. '레트로'는 우리말로 '복고'를 이야기한다. 영어의 'Retrospect'의 준말로 옛날의 상태로 돌아가거나 과거의 체제 전통 등을 그리워하여 그것을 따르려는 것을 말한다. 트렌드를 앞서 가는 패션 분야에선 이미 프랑스의 한 유명 디자이너가 1970년대에 1940년대 패션을 재현하면서 '레트로룩'이란 말을 만들어냈다. 이를 시작으로 '레트로'는 '접두어'의 한계를 박차고 신조어가 되어 '명사화'되었다.
그렇다면 '뉴트로'는 무엇인가?
과거의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은 레트로와 같지만, 그것을 향유하는 목적은 다르다. 즉, 레트로는 '향수'를 향유하는 반면 뉴트로는 '재미'를 소비한다. 밋밋하고 뻔한 걸 싫어하는 새로운 세대에게, 옛것은 잠시 단절되었다가 나타난 '새로운 문화'이자 '새로움의 무엇'인 것이다. 90년대 음악방송을 '탑골 가요제'라 명명하고 자신들만의 재미 요소로 그것을 즐기는 '밈' 문화가 대표적인 예다.
어렸을 적 나는 가요무대를 보며 심금이 울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마냥 즐기진 않았다.
따분하고 지루한 순간이 더 많았고, 어머니가 어서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만을 바랐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지금이 세대는 옛것을 즐기고 새로운 문화로 재탄생시키기까지 한다.
그래서 난 '레트로'와 '뉴트로'의 공존을 넘어, 다음엔 무엇이 나타날 것인가가 사뭇 궁금하다.
'레트로'가 생긴 이유
그러니까, 그다음을 생각해보기 전에 나는 지금의 현상을 좀 더 파헤쳐 보고 싶단 생각이다.
인간의 '감정'의 동물이지만 철저하게 '경제적 동물'이다. 즉, '레트로'가 생긴 이유를 심리적 관점으로 해석하기도 전에 이미 레트로를 활용한 경제적 태동이 일어나고 만다.
그럼, 우선 '레트로'가 생긴 이유를 짚고 넘어가 보고자 한다.
'왜'라는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면 그래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
첫째,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
인간은 진화한다.
그리고, 한 번 진화하면 뒤로 회귀하지 못한다. 휴대폰만 해도 그렇다. 한 번 휴대폰을 사용하는 단계로 올라가면 우리는 절대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은 '뒤'로 회귀하지 못한다. 진화는 '편리함'이나 '문명의 이기'를 목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도한 '편리'와 '문명의 이기'는 '본질'을 전도시키는 역설을 초래한다.
멀리 떨어진 사람과 번개와 같은 속도로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낼 수 있는 편리함. 본질은 보다 편리하고 신속하며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지만, 그로 인해 소외되는 내 바로 옆 사람과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단체 카톡방 등을 떠올려보면 과연 우리는 진화한 것이 맞는가란 의문이 든다.
이로써 사람은 지난날을 떠올린다.
휴대폰이 없던 그 시절. 길이 엇갈려 비 오는 날 각자의 짚 앞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렸던 풋풋한 추억. SNS나 유튜브가 없어 벤치에 앉아 사색하거나, 가만히 앉아 책을 읽던 그 시절.
나는 우리가 절대 아날로그로 회귀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회귀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우리는 그것을 향수하는 것이다.
둘째,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
인류의 역사가 언제,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오늘은 물론 바로 이어질 내일은 인류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이라는 것이다. 역사와 문화는 돌고 돈다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원시시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에 접어들며 산업화를 거치고, 제국주의와 경제 대공황 그리고 냉전시대를 거쳐 신자유주의에 다다른 우리네 인류.
헤겔의 이론에 따라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역사를 거쳐왔다고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무엇이 '정'이고 무엇이 '반'인지가 명확하지 않은 시대다. 다양성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와 수용성의 확대로, '남자'와 '여자'라는 생물학적 경계도 사라지고 선진국이라는 기준도 애매모호해졌다.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합쳐져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있는 것처럼 발전하다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한 번 정해진 것을 뒤집기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은연중 내비치고 있다.
즉,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예측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
인간은 자고로 두려움 속에서 과거를 회상한다.
역사를 뒤지고, 지난날의 지혜를 갈구하며 때로는 옛날로 도망친다.
셋째, 새로움을 찾아 과거로
앞서 이야기한 '밈'문화와 결을 같이 한다.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인간이 찾아낼 수 있는 새로움은 단절되었던 과거의 무엇이다. 사실, 지금 시대는 새로운 게 더 이상 없어 보인다. 상품이나 재화, 서비스 등.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더 이상 생산해낼 것이 없는 시대.
그래서 사람들은 있는 것들을 '연결'하기 시작한다.
'에어비앤비', '배달의 민족', '우버', '페이스북' 등.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무언가를 '연결'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생산해내지 못하니 있는 것들을 연결하여 새로운 경제모델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연결'이라는 관점은 꼭 경제모델이나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공간을 넘어서 결국 '과거로의 연결'을 꾀하는 것이다.
옛 것이라도, 새롭고 재미있으면 그건 곧 '새로움'이 된다.
이미 옛것의 '새로움'은 발견되고 소비되고 있다.
그것도 매우 활발하게.
'레트로'와 '상업'의 만남
눈치 빠른 경제적 주체들은 그래서 '레트로'를 상업화한다.
레트로의 시작은 '향수'라는 '감정'인데, 확산은 '경제적 이유'가 더 크다.
디즈니가 왜 지난날의 애니메이션을 실사화 하고 있는지 눈치챘는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 그 만화를 보고 자란 어린이들이 부모라는 소비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 때 본 추억의 만화를 이제는 내 아이들과 손잡고 함께 향유하는 것이다. 부모는 (지난 날) 향수에 빠지고, 아이들은 (새로운) 재미에 빠지고.
그래서 일각에서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실사화를 추억 깨기라 비판하기도 한다.
밀가루 브랜드의 밀맥주, 옛 로고를 '오리지널'로 사용하는 스포츠 브랜드.
못생긴 운동화와 촌(?)스럽게, 큰 알파벳으로 브랜드 이름을 박아 놓은 티셔츠까지. 타자기 모양을 그대로 본뜬 (블루투스) 키보드는 다른 일반 키보드와 큰 차이점이 없는데, 레트로 디자인의 프리미엄을 안고 수십만 원을 호가한다.
심리적으로 생산해낸 레트로 문화와 콘텐츠는, 그렇게 상업화되어 소비되고 있다.
물론, 상업화가 좋은가 나쁜가에 대한 판단은 할 필요가 없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면서, 경제적 동물이기 때문에 본능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본능의 본질을 알아차리려 한다.
그래서 나는 생산하고 있는지, 소비하고 있는지.
그 어딘가에 나는 서 있는지. 생산을 하고 있다면 왜 하고 있는지, 소비를 하고 있다면 무엇을, 왜 소비하고 있는지 등을.
'레트로', 온 국민의 라떼화
레트로는 한 국가에 한정되는 문화 양상은 아니다.
다만, 나는 우리나라가 좀 더 그것에 민감하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바로 '우리'와 '꼰대' 문화다.
전 세계에서 '우리'라는 인칭 대명사를 이리도 적극적으로 쓰는 나라가 없다.
'우리나라', '우리 남편', '우리 아내', '우리 집' 등. 영어로 그대로 직역하면 상상하지 못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ex. Our wife...???)
아무리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정착되고 있다지만, 우리네 무의식엔 '집단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삼면으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침략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똘똘 뭉친 역사 그 자체다. 개개인의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지만 IMF나 태안 기름 유출, 그리고 최근의 불매 운동까지. 아무 일 없으면 서로를 헐뜯다가도, 무언가 집단적으로 힘을 발휘해야 할 때가 오면 무서우리만큼 모여드는 민족이다.
그러니, '레트로'에 대한 열광은 다름 아닌 '우리'의 것이다.
미니홈피에 대한 추억도, 내가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아쉬움이다. 나 혼자 즐기는 문화는 '레트로'가 될 수 없다.
더불어, '꼰대'문화.
즉, '라떼는 말이야'는 어찌 보면 '레트로'의 근간이다.
'그때가 좋았는데.' '나 때는 그랬는데.'
그것을 강요하면 꼰대가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된다.
그러함에도, '레트로'가 상업화되면서 '향수'와 '재미'를 넘어 강요 아닌 강요가 되는 건 아닐까 우려스럽다.
최근 한 때 전성기를 누렸던 가수와 개그맨이 팀을 이루어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었는데, 옛 노래들을 들을 수 있어 처음엔 좋았지만 반복되는 방송으로 인해 피로감이 몰려온다. 추억도 정도껏 떠올려야 한다. 때론, 잊고 살아야 추억이 고스란히 묻혀 있다가 반갑고 새롭게 떠오르는 법이다.
자꾸만 온 국민에게, '그때가 좋았지?'를 강요하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다.
(상업화와 미디어가 활성화시키는)'레트로'가 온 국민을 라떼화 시키는 건 아닌가라고, 나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과거를 보지만 미래를 보지 못한다.
원래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예전엔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 중이어서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Present Casting'이란 말도 생겼다.
즉, 이제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곧 미래의 모습이며 그것을 알아차리고 '적응'하고 '대책'을 세우라는 것.
아마도 'Present Casting'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 바로 '역사' 즉, '레트로'를 참고하는 일일 것이다. '그때가 좋았지...'라고 신세 한탄을 하거나 과거에 취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우리가 배울 것을 알아차린다면, 단순한 상업적 소비가 아니라 그것이 생겨난 이유와 생산적인 관점에 초점을 맞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