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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un 15. 2020

관점이 곧 삶이다.

보고 받아들이는 모든 것에 의심을 품으며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1428)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양 옆에 서 있는 마리아와 성 요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성부.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다.


처음 이 그림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요동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충격'이라고까지 묘사했다. 벽 뒤를 뚫고 그림을 그렸다고 착각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지금 보면 그리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그림이 왜 당시 사람들에겐 충격이었을까?


최초로 '원근법'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원근법은 건축가인 브루넬레스키가 발견한 것인데, 이를 최초로 적용한 사람이 마사초이고, 최초로 적용된 그림이 바로 이 '성 삼위일체'인 것이다.


'원근법'과 '삼원법'


'원근법'은 화가가 대상을 그림으로 그릴 때 공간을 지각하는 방식을 말한다.

2차원의 표면에 3차원의 이미지와 공간 관계를 표현해야 하는 고도의 기술이자 수학적 계산이다. 재밌는 건 시대와 지역에 따라 공간을 지각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즉, 원근법은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느끼고 보고 있는가를 나타내 주고 있고 동시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원근법은 크게 '소실점'과 '좌표'로 구성된다.

소실점은 모두가 수긍하는 '객관성'이고, 좌표는 치밀하게 계산된 '합리성'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예술과 문화의 관심은 신으로부터 사람에게로 전환되고, 객관성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문화와 산업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것이 서양의 문화를 대표하는 핵심 가치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동양은 어떨까.

미술이라는 같은 분야에서 비교를 해보면, 동양엔 삼원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산수화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고원, 심원, 평원 등 3가지 종류의 투시법을 말한다.

고원법은 산 아래에서 산 위를 보는 것, 심원법은 산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평원법은 수평적으로 보는 전망을 이야기한다.


흥미로운 건 동양의 경우는 삼원법이 동시에 쓰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림을 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전체적으론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심원법이 쓰였지만 우측의 웅장한 산은 고원법을, 소나무로부터 건너편의 산은 평원법으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서양과 동양은 바라보는 시선이 달랐음을 알 수 있는데, 미학자 고유섭은 서양인은 '보고 있다'이고, 동양인은 '보아 간다'라고 정의했다.

일각에선 서양인의 시각을 '주체 중심', 동양인의 시각을 '객체 중심'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무엇이 옳고 그름은 논할 주제가 아니다.


다만, 같은 사물과 장면을 마주하고도 다르게 본다는 그 지점이 곱씹을 만한 주제인 것이다.


'Perspective'
'관점'과 '원근법'


그래서, 영어 단어 'Perspective'의 뜻이 흥미롭다.

사전을 찾아보면 '관점'이란 뜻 외에 '원근법'이란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관점'과 '원근법'이 한 단어라는 것. '원근법'이 단순한 미술 기법이 아니란 이야기다.


그렇다면 서양과 동양은 '관점'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서 살펴봤던 문화의 차이는 물론, 고맥락과 저맥락의 차이도 어쩌면 '관점'의 차이로 바꿔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보는 것이 다르니 문화가 다르고, 맥락이 다른 것이니까.


서양의 객관성과 합리성은 분명 산업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대부분의 서양 국가들이 '선진국'이란 타이틀을 얻은 이유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가 먹고살만해지고 상향 평준화가 되면서 '선진국'의 민낯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양에서 동양으로 흐르던 문화가 반대로 영향을 미치고 있고, COVID19과 같은 위기의 상황에서 앞서 간다던 서양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인종 차별에 대한 행동을 보면 더 가관이다.)


혹자는 그래서 만약 누군가 우주를 그릴 수 있는 능력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그것은 동양인의 공간감을 사용하는 화가일 거라 말한다. 이와 더불어, 세계의 패권이 동양으로 기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동양과 서양 그리고 세계의 패권 등을 떠나 그저 우리 삶으로 돌아와 보자.

거대한 담론보단 당장 먹고살아야 하는 우리 삶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앞서 살펴본 원근법과 삼원법을 통해 말하고 싶은 건 결국 '관점'이다. 원근법과 삼원법은 관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뒷받침하려는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관점'은 결국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심리학에서도 이를 파헤치기 위해 '지각 심리'와 '인지 심리'를 공부한다. 사람의 눈과 귀 그리고 촉각을 통해 전해져 온 외부 자극들이 어떻게 전해지는지. 그리고 그 자극이 어떻게 해석되어 사람의 정신과 몸에 반응을 일으키는지. '관점'으로 촉발된 사람의 심리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파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관점'이 곧 우리 삶이 된다는 걸 자각하는 것이다.

'관점'을 바꿔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듣는 이유다. 그러나 관점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동양과 서양이 서로 다르게 보고 싶어서 다르게 보는 것인가. 그것은 예로부터 내려온 집단 무의식과 문화의 차이, 그리고 삶의 방식 등이 만들어낸 계산 할 수 없는 변수의 결과다.


그러나 내가 보는 '관점'에 대해 의심을 품을 때, 변화의 희망은 보인다고 믿는다.

관점을 바꾸라는 말이 지겹게 들리는 게 아니라, 과연 관점을 바꿔보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어쩌면 올바른 의심이 될 수 있다. 그 의심을 바탕으로 내 관점을 바꾸어 봄으로써 성장하거나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마사초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

삼원법이 얼기설기 모인 동양화 속 혼돈.


그 충격과 혼돈 속에서 빠져나와 더 큰 구도와 의미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싶단 생각이 문득 든다. 그리고 그 지혜는 분명 내 안 어딘가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인문학에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가려는 나의 의지이자 목적이다.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보고 받아들이는 모든 것에 의심을 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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