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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26. 2020

삶의 역설은 통찰이다.

기어이 찾아낸 역설은 삶의 통찰인 것이다.

앞서, 인생은 '모순'이 아니라
'역설'이라 했다.


'역설'은 상반된 것들 중간에 설 때 보인다.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고, 경계에서 온전히 그 둘을 바라볼 때 비로소 보인다. 한쪽에 치우쳐 있을 때, 우리는 맞서거나 대립되는 반대의 것만 본다. 반대의 것은 불편하다. 반대의 것은 불쾌하다. 그래서 온 힘을 그 반대의 것을 밀쳐내는데 쏟아붓는다. 그러는 동안 '나'는 점점 더 옅어진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여 고수한다는 건 안정을 위함이다.

경계는 모호하기 때문이고, 모순되는 것들 사이는 아슬아슬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순'이 '역설'이 되는 최초의 순간은 바로 그 경계에 서보는 것이다. 그제야 깨닫는다. 반대되는 것들의 경계는 오히려 안정되고, 어느 한쪽을 선택한 양극단이 더 크게 흔들린다는 걸. 정작, 태풍의 눈은 세상 고요하다는 걸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모순의 역설이자, 역설의 역설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삶 속에서 '모순'을 불편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역설'을 끄집어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양극단의 모순,
모순 속의 역설


노자는 하늘이 푸르려고만 하면 깨지고, 땅이 단단해지려고만 하면 꺼진다 말했다.

하늘은 항상 푸를 수만도 없거니와, 땅도 단단하기만 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단순하지가 않다. 모든 번뇌와 혼란은 단순하지 않은 마음에서 온다. 우리는 항상 행복해야 하며, 항상 즐거워야 한다는 강박에 싸여 있는 것이 항상 푸르고, 항상 단단하려고만 하는 하늘땅과 다를 바가 없다. 


고로, 어느 하나를 확실하게 선택해야 우리 삶은 선명해질 거란 믿음은 위험하다.

좌파니, 우파니. '극'이라는 말이 붙어 양극단으로 치닫는 사람들을 보면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 나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라는 오만은 버려야 한다. 나는 오늘, 어디로 치우쳐져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노자는 이러한 지혜를 갖는 것을 '명(明)'이라 했다.

명이라는 글자 안에 '해'와 '달'이 공존하고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유가 있으면 무가 있으며 그 상반되는 것들은 서로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역설'의 운명을 지닌 것이다.


다시, '역설'은 '모순'속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역설'은 삶의 통찰이다!


나는 '삶'이 의미 찾기의 과정이라 생각한다.

마치 숨은 그림을 하는 것처럼, 절대자가 숨겨 놓은 삶의 '진리'와 '깨달음'을 찾아가는. 내가 찾는 그것들은 일상에 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봐야 하고, 샅샅이 뒤져야 한다. 숨은 그림을 찾는 사람이 눈을 크게 뜨고, 오롯이 그것에 몰입하는 것처럼.


그렇게 삶의 의미를 찾게 된 것은 글쓰기를 하고 난 후다.

글쓰기는 일상을 달리, 더 자세히 그리고 천천히 보는 능력을 선사한다. 무게 중심을 나로 잡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나를 반성하며 대립하는 것들의 경계로 향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태풍의 바람에 휘둘렸던 내가, 유유히 태풍의 눈 속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그 경계면에서 나는 삶의 모순과 부조리를 불러 낸다.

나를 괴롭혔던 사람, 내가 어려웠던 상황. 반대로 내가 잘 나가던 때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많은 것들을 얻었던 그때. 그리고는 그 반대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균형을 잡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 경계면으로 위치를 옮기는 작업이다. 

나를 괴롭혔던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내가 어려웠던 상황에서 오히려 얻어낸 건 무엇인지. 내가 잘 나갈 때 놓쳤던 것들과 쉽게 얻은 것들로 인해 잃어버린 건 무엇인지. 역설적으로, 나는 무에서 유를 얻었고. 다시, 유에서 무를 얻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내가 앞으로 나아갈 때, 내 주변은 후퇴한다.

반대로, 내가 후퇴할 때 주변은 앞으로 나아간다. 고로, 나는 언제나 전진과 후퇴를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이고, 언제나 그 경계에 있는 것이다. 잘 나간다고 우쭐 댈 필요도 없고, 뒤처진다고 마냥 슬퍼만 할 필요가 없다. 잘 나갈 때 뒤로 가는 것을 보고, 뒤처졌을 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볼 줄 아는 '명(明)' 즉, '역설'을 잽싸게 알아채는 능력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모순에서 역설을 끄집어내어 '명'으로 승화시키는 그 순간과 결과물을 '통찰'이라 일컫는다.

그 '통찰'은 삶에서 얻는 꽤 짜릿한 자극이며, 가슴을 뛰게 만드는 내가 만들어내는 삶의 희망이다.




내가 글쓰기를 결심했을 그때를 돌아보면, 나는 정신적으로 매우 허름해있던 때였다.

정신이 허름하고 힘들었기에 글쓰기를 시작했고, 글쓰기를 통해 나는 오히려 더 성장했다. 더불어, 그것으로 인해 힘든 일도 겪었고, 소신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삶은 그렇게 모순의 연속인 것이다.

모순은 그렇게 역설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기어이 찾아낸 역설은 삶의 통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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