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May 24. 2020

인생은 '모순'이 아니라 '역설'이다.

우리는 이미 '모순'을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혐오스러울 때가 있다.


온통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의 집합체가 판을 치고,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으르렁거리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은 삶을 지치게 한다. 좌파니 우파니, 꼰대니 아니니, 부자니 아니니 등. 모순은 딜레마를 말하고, 다시 딜레마는 Di(둘, 맞섬) + lemma(주장)으로 갈린다. 아니, '모순'이라는 말 자체가 무엇이라도 뚫어버릴 수 있는 '창'과 무엇이라도 막아낼 수 있다는 '방패'를 말하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이러한 모순이 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와 반대되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 덤비고, 심지어는 내 안에서도 '나'와 '또 다른 나'가 대립한다. 그 맞섬 들은 매우 입체적이어서 때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낙담하고, 그저 세상은 혐오스러운 것이라 결론짓곤 한다.


맞섬과 대립은 참으로 피곤한 관계다.

그냥 대립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면 안 되는 것인지. 서로 배타적이어서 양립할 수 없는 그 관계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


아마도, 이러한 혐오와 숨 막힘은 사춘기 때 극에 달하지 않았나 싶다.

세상의 중심인 나와 반대되는 모든 것들은 배타적이고, 나를 숨 막히게 하는 악당이었던 걸 되돌아보면 그렇다.


노자의 유무 상생(有無相生)


천하 모두가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이 됨을 아는 것은 추함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선이 선이 됨을 아는 것은 선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고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며, 길고 짧음이 서로 비교되며, 높고 낮음이 서로 기울고, 가락과 소리는 서로를 조화시키며, 앞과 뒤는 서로를 따라간다.

- 노자 '유무 상생', 도덕경 中 -


그러나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모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세상이 그렇지 뭐."
"삶이 그런 거 아니겠어?"


누가 알려 주지 않았는데도 모순을 받아들인다는 건, 삶의 풍파에 풍화된 자아를 맞이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이 드는 때에, 나는 '나'와 이 글을 읽는 '여러 사람'을 위로한다. 혐오스러운 세상 살아오느라 모두 고생했다고.


'역설'은 Para(넘어감, 초월) + doxa(의견, 도그마), 즉 '패러독스'를 말한다.

삶의 풍파에 풍화된 우리는 이미 '모순'을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위에 노자의 '유무 상생'을 언급해 놓았다.

이는 우리가 노자의 뜻을 따라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이러한 삶을 살고 있는데 노자의 도덕경 일부를 볼 때 과연 그 말이 맞는구나를 다시 한번 더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즉, '유무'는 모순과 같이 대립되는 관계가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는 명백히 부조리하지만, 그 속에 '그 둘은 상생하고 있다는 진실'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대립되는 것들과 부딪치고 갈등하며 몸소 배운 것들이다.


인생은 '모순'이 아니라 '역설'이다.


우리는 '희(喜)'와 '비(悲)'를 대립적인 존재로 본다.

그러나 우린 '희'에서 '비'를 발견하고, '비'에서 '희'를 맞이하기도 한다. 잘 나가는 사람에게 드리우는 그림자와 실패했다고 좌절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전화위복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어렵고 추상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근력 운동을 하는 우리를 생각해 보자.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려는 우리의 '작용'과 중력을 거스르려 하지 않는 추의 무게는 '반작용'이다. '작용'과 '반작용'이 반복되면 그것은 '모순이라는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근육이 단련되는 '역설이라는 결과'가 된다.


즉, 모순은 전체를 보지 못하는 사춘기 시절의 시야와 같고, 역설은 좀 더 넓은 관점으로 바라보는 (인생을 좀 겪어 본 진정한) 어른의 넓은 시야라 볼 수 있다.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선 '모순'과 '역설'은 구분하되, 어느 하나만 골라선 안 된다.

'모순'을 직면하고 바라보는 '역설'과, 먼저 '역설'하고 바라보는 '모순'은 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숲을 바라보고만 살 수 없고 또 언제나 들꽃 하나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살 수 없다.


인생은 '모순'만이 아니고, '역설'만도 아닌 것이다.


대립되는 것들, 나에게 덤벼 오는 세상, 당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그 속에서 우리는 '모순'이라 투덜대면서도 그것들이 나를 더 성장하게 할 '역설'을 꾀스럽게 찾아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역설'의 미학이자, 삶의 소소한 즐거움이라고 나는 믿는다.




[종합 정보]

스테르담 저서, 강의, 프로젝트


[신간 안내] '무질서한 삶의 추세를 바꾸는, 생산자의 법칙'

[신간 안내] '퇴근하며 한 줄씩 씁니다'


[소통채널]

스테르담 인스타그램 


이전 03화 인문학은 고전을 벗어나야 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