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누가 이렇게 인문학을
어렵게 꼬아 놓았는지 모르겠다.
인문학은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니, 어디 멀리서 인문학의 진리와 지식을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 '나'는 '인간'이므로 답은 '내' 안에,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네'안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묻고 싶다.
대체, 누가 이렇게 인문학을 어렵게 꼬아 놓았을까? 그건, 다름 아닌 우리다. 나 자신이며, 당신 자신이다. 유명한 철학자의 말을 빌리거나, 어느 예술 작품을 깊숙이 공부하고 연도를 외우며 술술 풀어내야 우리는 그것을 인문학의 완성이라 말한다.
인문학 본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교양'이란 껍데기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모양새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방해가 되는가!
나는, 철학이 '교양'이 되고 '지식'이 될 때 삶에 방해가 된다고 믿는다.
내 생각보다, 누군가의 말이 더 중요하다고 맹신하는 순간 내 본연의 가치는 소멸한다. '지식'과 '교양'은 참고로 족하다. 배움을 통해 얻은 지식은 내가 잘게 씹고 소화하여 힘과 영양분을 얻고는 나만의 '생각'과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장자의 천도 편에는 수레바퀴를 깎는 노인인 윤편의 일화가 나온다.
윤편이 제나라 환공이 읽는 책이 무엇인지를 물었고, 환공은 성현의 말씀이라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윤편은 왕이 읽고 있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라 말한다. 왕이 버럭 하며 이에 대한 합당한 대답을 하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엄포를 한다.
그러자 윤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고는 목숨을 부지했다.
"제가 하는 일의 경험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 굴대가 헐렁해지고 덜 깎으면 너무 조입니다. 그래서 더도 덜도 아니게 정확하게 깎는 것은 손 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뿐 입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요령은 자식에게도 가르치지 못하고 자식도 저에게 배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칠십이 되도록 이렇게 손수 수레바퀴를 만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옛 성인들도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채 적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읽으시는 것이 옛 성인의 찌꺼기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자, 지금보다 옛 성현의 말씀이 더 가까웠던 그 시대에도.
말과 글이 그 모든 걸 담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성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에는 경계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의 마음에 던지는 '왜'라는 돌
그래서 나는 인문학이란, 나의 마음에 던지는 '왜'라는 돌이라 말하고 싶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나'는 인간이고, 인문학은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이므로 내가 나를 깊숙이 바라본다면 그것보다 확실한 현장실습이 있을까 싶은 것이다.
잔잔한 호숫가에 돌을 던져 봤을 것이다.
돌이 입수하는 그 면적은 크지 않지만, 온 호숫가를 잔잔하게나마 출렁이게 한다. 그 파장은 작게 시작하여 크게 퍼진다. 나는 그 돌에 '왜'라는 글자를 새기고, 내 마음속 호수 저 멀리에 그것을 던져본다. 그것으로부터 일어나는 파장은 나에게 대단한 희열을 안겨 주는데, 꿈쩍하지 않던 일상이 유연해지고 평범하기만 하던 삶의 부분 부분이 특별해짐을 느낀다.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왜 먹는가.
나는 왜 쓰는가.
나는 오늘 기분이 왜 이런가.
나는 수치심이 들 때, 행복함을 느낄 때 왜 그러한 반응을 보이는가.
물어본 적 있는가.
너무 뻔한 질문이라 해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대답은 더더욱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멈춤 없이 내 마음속 호수에 '왜'라는 돌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 하나.
일어나는 파장을 내 생각과, 내 목소리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말하는 것이다. 옛 성현들의 깨달음은 그들의 것이다. 내 것이 그것과 일치한다면 더더욱 확신을 하면 되고, 일치하지 않는다면 의문을 품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누구의 것이 맞을지는 판가름이 난다. 성현의 말이라고 해서, 그 이야기에 내 삶을 꾸역꾸역 끼워 맞춰선 안된다. 그것은 인문학이 아니라, 지식으로 변질된 헛교양이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저자 최진석 교수는 말한다.
외국 철학자들 이름을 막힘없이 들먹이면서 그 사람들 말을 토씨 하나까지 줄줄 외우는 것보다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애써 자기 말을 해보려고 몸부림치는 자, 이념으로 현실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현실에서 이념을 새로 산출해 보려는 자, 믿고 있던 것들이 흔들릴 때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자, 이론에 의존해 문제를 풀려하지 않고 문제 자체에 직접 침투해 들어가는 자, (중략)
바로 이런 자들이 '사람'입니다.
- 최진석, <인간이 그리는 무늬> 中 -
어느 철학자의 말보다,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스스로 깨달아 내어 놓는 탄식이 진리다.
그리고 그 진리가 바로 '인문학'이라고 나는 믿는다.
인문학을 어렵사리 베베 꼬아 놓은 스스로를 반성한다.
지식과 교양이 인문학의 전부라 믿었던 나 자신을 추스른다.
인문학은 결국,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알아차리는 것이며, 살아 남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맞이하는 모든 것들과의 부딪침이자 소통이다.
나의 마음에, '왜'라는 돌을 계속해서 던지며 나는 그 부딪침과 소통을 이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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