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Jul 18. 2020

삶은 균형 맞추기다

그 균형은 내가 맞추어가야 한다는 걸 깨달으며.

나는, 신이 나에게
시소 하나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신이 그의 피조물 모두에게 시소 하나를 주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시소는 절대 평행을 유지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평행이 유지되지 않는 시소라. 그게 무슨 이야기 일까. 아주 확실한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나는 너에게 시소 하나를 주노라. 그리고 네가 그 시소의 평행을 맞추면 '행복'을 느끼게 해 주겠다."

자, 우리가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자.

눈치챘는지 모르겠다. 나는 '순간'을 떠올려 보자고 했다. 즉, '행복'은 '순간'이다. 그리고 시소의 균형이 맞추어지는 때는 바로 '순간'이다. 균형이 맞추어지지 않는 시소의 평행은 바로 '순간'인 것이다.


사람은 '행복'함과 동시에 '불안'을 떠올린다.

'이 행복이 깨지면 어떡하지?', '너무 행복하면 뭔가 불안한데...'란 생각이 저절로 떠오른다. 그러니 온갖 자기 계발서에서는 이 '순간'을 만끽하라고 이야기한다. '지금 그리고 현재'는 'Present' 즉, 선물이라고까지 표기하면서 그 사실을 힘주어 강조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소는 절대 평행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증거다.

어쩌다 잠시 잠깐 평행이 유지된다면 그것은 '순간'이며, 그 '순간'을 만끽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이다. 오히려, 억지로 평행을 맞추려 할 때 우리는 더 불행해진다는 걸 알게 된다. 행복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않고 그것을 '붙잡으려' 할 때,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후회스러운 결과를 맞이 하는가.


그저 살다가 어느 평행의 '순간'이 오면 그것을 감사해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또는, 평행이 맞지 않더라도 그 상태에서 의미를 찾고 마음의 균형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정리하면, 삶은 결국 균형 맞추기의 끊임없는 반복이고, 그 균형은 절대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균형'은 '중심' 맞추기의 다른 말


'균형'은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고 고른 상태'를 말한다.

기울지 않거나 치우치지 않으려면 '중심'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 '중심'을 알게 모르게 추구한다. 그리고 그 '중심'은 저마다 다르다.


저마다의 '중심'을 찾았을 때 사람들은 행복해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행복은 마음이 편안한 때를 이르기도 한다. 물로 채워진 잔. 흔들리지 않는 그 상태를 중심이라고 보면, 그 상태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세상은, 사람들은 심지어는 나 자신조차 그 마음의 물 잔을 이리저리 흔든다. 때론 물이 넘치고, 때론 컵이 요동하며, 또 때론 그 컵이 떨어져 깨지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내 잔의 크기를 알고, 깨진 잔을 다시 빚으며 삶의 의지를 다시 불태운다. 다시 '중심'을 향하려는 본능과 함께, 그렇게 우리는 깨지고 깨닫고, 다시 일어나고 성장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불편한 마음을 지양한다.

그리고 편한 마음을 지향한다.


즉, 저마다의 '중심'을 애써 지키려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중심'의 중요성에 대한 이론과 사상들


다행히, 이런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이론과 사상들이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나는 그것들에서, '신이 준 그러니까 평행이 맞지 않는 시소'의 흔적을 발견한다. 과연, 시소는 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1. 중용(中庸)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저술한 책이며 논어, 맹자, 대학과 더불어 사서에 속한다.

'중용'의 의미는 '과하거나 부족함이 없이 떳떳하며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상태나 정도'를 말한다. 말 그대로 '균형'을 찾는 행위이며, '중심'을 향해 매진하려는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용은, 사람은 누구에게나 '인간적 욕심'과 '도덕적 본성'이 함께 있다고 말한다.

아주 지혜로운 사람도 '인간적 욕심'이 없을 수 없고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도덕적 본성'이 없을 수 없는데, 이 두 마음을 다스리는 이치가 바로 '중용'이다.


그래서 중용은 '성(性)', '도(道)', '교(敎)'를 근간으로 한다.

'성'은 '하늘이 준 사람 속에 있는 하늘의 속성'을 말하고, '도'는 '하늘이 부여한 본연의 성품을 따르는 것' 그리고 '교'는 '도'를 마름질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중용'은 쉽지 않은 일이다.

평생을 갈고닦아야 하고 '인간적 욕심'과 '도덕적 본성'사이에서 방황해야 한다. 그 균형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데, 그나마 그 '중심'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중용'이란 것이다.


균형이 맞지 않는 시소 사이에서, '중용'은 어떻게라도 아주 잠시라도 평행을 만들어내려는 우리네의 발버둥을 이야기한다.


2.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동양에 '중용'이 있다면, 서양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있다.

프로이트는 사람의 심리를 3가지로 구분했다. 바로 '이드(원초아)'와 '에고(자아)' 그리고 '슈퍼에고(초자아)'가 그것이다. 

'원초아'는 인간이 가진 원초적 본능 욕구이고, '초자아'는 도덕적 양심을 말하는데 '자아'는 그 중간에서 외부세계에 맞추어 그 둘을 중재해야 한다. 


'원초아'와 '초자아'의 충돌은 언제나 일어나므로 '자아'는 녹초가 되고, 이것이 곧 우리 삶을 힘겹게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즉, '자아'는 '원초아'와 '초자아'의 균형을 맞추어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는, '중심'을 잡기 위한 고군분투다. 만약, 이것이 제대로 중재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경증'에 시달리거나 여러 가지 '정신적, 마음적'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설명을 들었을 때 앞서 말한 '중용'과 비교를 해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있지 않은가? 

단어만 바뀌었을 뿐, 그 내용이 판에 박은 듯 똑같다는 것이다.


'중용'에서 말한 '인간적 욕심'은 정신분석학의 '원초아'와 같다.

'중용'에서 말한 '도덕적 본성'은 정신분석학의 '초자아'와 같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중재를 맡은 고된 개념들이 각각 '중용'과 '자아'인 것이다.


동양과 서양에서 복사, 붙이기를 하지 않은 이상 어떻게 이렇게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걸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이 준 시소는 균형이 맞추어지지 않는다는 걸 현자들은 이미 파악을 한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이다.


3. 호메오스타시스


한 가지 개념을 더 알아보자.

우리는 배가 고파도, 배가 불러도 기분이 좋지 않다. 즉, 균형이 맞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배가 고프지도, 배가 부르지도 않은 그 상태를 떠올려 보자. 삶의 세월에서, 그러한 기분을 느낀 적이 얼마나 되는가? 아니, 얼마나 오래 느껴 봤는가? 이제, 내가 말하는 '균형'의 의미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었으리라 믿는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먹기 시작하면 배가 불러서야 그만두는 인간의 본성.

즉, 거듭 말하지만 삶은 '균형'맞추기의 반복이고, 그 '균형'은 '순간'적으로만 맞춰질 뿐이다.


'호메오스타시스'는, Homeo(Same)와 stasis(to stay)의 합성어로 외부환경과 생물체내의 변화에 대응하여 순간순간 생물체내의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현상. 쉽게 말해 가장 알맞은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항상성'을 의미한다. '생리학'에서 시작된 이 용어는 '심리학'에 연결되어, 우리가 마음의 중심 그러니까 '편안한 마음'이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들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쉽게 말해, 스트레스를 받으면 쉬고 싶고 또 너무 쉬면 일을 하고 싶은 우리의 모습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다.

삶의 균형 맞추기, 중심 찾기는 그래서 중요하고, 어렵고, 매일매일 추구해야 하는 무엇이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오늘도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시소에 앉아 있다.

누가 그 시소를 주었는지. 왜 우리는 시소를 타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고개를 들어 진지하게 묻거나 따지고 싶지만 절대자는 우리에게 그럴 마음의 여유를 주지 않는다.


우리는 어서 고개를 떨구고 먹고살아야 하는 생존에 힘을 써야 하고, 그러는 와중에 균형이 맞지 않는 시소에서 평행을 유지하려 고군분투해야 한다.

그리하면, 언젠가 드디어 맞이한 '중심'에서 우리는 그것을 아주 잠시 만끽할 수 있다. 그 '순간'은 '행복'일 수 있고 '기분 좋음'일 수도 있으며, '편한 마음'이나 '짜릿한 마음'일 수 있다. 어찌 되었건, '내가 살아 있구나'란 존재의 의미를 깨우쳐주는 그 일련의 감정들에 우리는 (기분 좋게) 중독되어 또 그 '중심'을 향해 달려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행동이나 생각들.

그 모두가, 각자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중심'으로 달려가기 위한 고군분투임을 잊지 말고 한 번 유심히 되돌아볼 수 있길 바란다. 그러면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조금은 더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삶은 균형 맞추기라는 것을 떠올리며.

그리고, 그 균형은 내가 맞추어가야 한다는 걸 깨달으며.




[종합 정보]

스테르담 저서, 강의, 프로젝트


[신간 안내] '무질서한 삶의 추세를 바꾸는, 생산자의 법칙'

[신간 안내] '퇴근하며 한 줄씩 씁니다'


[소통채널]

스테르담 인스타그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