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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ul 26. 2020

삶의 역설 활용하기

과연, 그것은 인문학이 주는 선물이다.

필사즉생(必死即生)
필생즉사(必生卽死)


"죽기로 싸우면 반드시 살고, 살려고 비겁하면 반드시 죽는다."

난중일기에 적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이 말은, 삶의 역설을 한 문장으로 완벽하게 정리한다고 말해도 과함이 없다. 말 그대로 반대되는 대척점에서, 삶의 역설은 빛과 어둠처럼 일어나고 있음을 명쾌하고 준엄하게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삶은 이를 고스란히 증명한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관직을 얻고, 그마저 파직과 백의종군이라는 인생의 쓴 맛을 맛보았으나 역사는 그를 기억하고 우리는 그를 추앙한다.


선조의 앙심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된 이순신.

그리고 이내 원균이 그 뒤를 잇지만, 그 결과 조선 수군 최대의 비극인 '일천량해전'을 맞이하고 대패하게 된다. 심지어, 조선 수군이 압도적이었음에도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패한 것인데, 선조는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변명에 급급했고 조선왕조실록에 그것은 하늘의 뜻이라 적어 놓았다.


이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 든 이순신은, 수군 해체와 육군으로 편입하라는 선조의 지시에 "상유십이척 미신불사(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고, 미천한 신도 아직 살아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실제로, 명량해전은 단 12척으로 왜선 133척을 격파하며 대승을 하게 된다.


이 '드라마틱'한 인생의 높고 낮은 곡선 그 자체를 두고 나는 삶의 '역설'을 떠올린다.

억울하게 빼앗긴 삼도수군통제사. 무능한 원균의 발탁. 그 상황은 누가 봐도 이해되지 않는,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고 이순신 장군에겐 어두운 긴 터널과 같은 시간이었으나 그러했기에 이순신 장군의 탁월함과 나라를 위한 마음이 끝내 더 빛을 발할 수 있었다.


과연, 인생의 흐름엔 높고 낮음이 있고, 눈 앞의 결과만으로 전체를 결단할 수 없는 게 삶임을 깨닫게 된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말을 몸소 이해하면서.


너무 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고(故)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란 노래 또한 삶의 역설을 말한다.

제목을 보고 한 번 가슴이 쿵 하고, 이어지는 가사와 멜로디를 듣고 또다시 마음이 요동한다. 나는 사랑을 깊게 추구했으나 그것은 결국 사랑이 아니었다는 가사를 동감하는 순간, 삶의 역설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이 성립이 안되는데, 그래서 사랑을 더 깊이 했더니 그게 사랑이 아니라니. 


나는 이 제목을 볼 때, 그래서 노자의 도덕경 첫 문구를 함께 떠올린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말로 '도'를 논하면 진짜 '도'가 아니다. 말로 이름 붙이면 진짜 이름이 아니다.'


과연,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

일종의 말장난과 같고, 일부러 단순한 걸 어렵게 포장하거나 꼬아 놓은 것 같은 역설을 마주하면 과연 인문학의 가치를 의심하기에까지 이른다. 이래서 인문학은 나와 상관없는 거라고 뒤돌아서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너무 깊은 고민은 고민이 아니니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할까.

열과 성을 다해도 안 되고, 무언가를 알고자 이름을 붙이거나 정의를 내리지도 말라는 깨달음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경계의 면에서 바라보는 삶


'삶은 균형 맞추기다'란 글에서.

나는 신이 내려준, 균형이 맞지 않는 '시소'를 언급한 바 있다. 우리는 이 '시소'에서 양쪽 끝과 무게를 생각하게 되는데, 요는 그 중심을 보자는 것이었다. 그 '중심'은 사실, 있다가도 없다. 균형이 맞추어지는 찰나, 우리는 또다시 어느 한쪽으로 바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중심'을 지향해야 한다.

양쪽 끝 어딘가로 쏠린 삶은, 그 반대급부로 인해 삶의 큰 '역설'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반짝반짝 빛나다 맞이하는 어둠도 있고, 반대로 내내 어둡다가 밝음을 맞이하는 역설의 카타르시스도 있지만 그 등락이 너무 심하거나 잦으면 삶은 그 이상으로 흔들리고 고단해진다.


시소의 중심.

그러니까, 달리 말해 '중용'. '과하거나 부족함이 없이 떳떳하며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상태나 정도.' 그야말로 '유토피아고', '이데아'인 그 어느 지점. 삶은 그렇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중심을 찾아가라고 '역설'이란 통찰을 선사하는 것이다.


잘 나간다고 우쭐할 필요 없고, 못 나간다고 주눅 들 필요도 없다.
너무 깊은 사랑으로 인해 내가 나를 잃거나, 상대방을 오히려 힘들게 하진 않았는지.
무언가를 알기 쉽게 정의하려고 무리하게 이름을 붙이려다, 그 본질을 한정 지으며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지.


이 모든 게 바로 시소의 '중심'에서 삶을 바라봐야 한다는 '역설'의 메시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다시, 시소의 중심은 '찰나'다. 중심이 맞춰지는가 싶으면 우리는 다시 어딘가로 치우친다.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이유다. 그리고 우리는 나약한 인간이므로, 살다 보면 어느새 저 쪽 어느 한쪽으로 쏠리고 만다. 


그러하면 할수록 우리는 '역설'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때를 잽싸게 알아채야 한다.

'아, 내가 어느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져 있구나. 다시, 중심을 잡아야겠다!'


'중심'은 빛과 어둠의 경계다.

어두운 데서 밝은 곳을 보거나, 밝은 곳에서 어둠을 보기보단 그 경계에서 양쪽을 바라봐야 함이 옳다. 그게 불가능한 것이라도, 그것이 아무리 찰나라고 할지라도. 그래야 한다고 삶의 '역설'이 우리에게 자꾸만 몸소 말을 거는 것이다.


삶은 '중심'을 찾아가는 자리싸움


스쿼시를 처음 배울 때였다.

내가 아무리 빠르게, 세게 라켓을 휘둘러도 나는 관장을 이길 수 없었다. 나중에 알았다. 내 실력이 분명 전문가보다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보다 '자리싸움'에서 진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음을.


관장은 항상 가운데 자리를 도맡고 있었다.

내가 공을 어느 한쪽으로 보내든, 그 공을 처리하고는 잽싸게 경기장 한가운데를 차지했다. 좌로, 우로, 앞으로 그리고 뒤로 헐레벌떡 뛰어다니는 건 나였다.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중심'없는 플레이가 가장 큰 패배 요인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내가 관장을 상대로 올린 몇 득점은 '중심' 잡기에 성공한 몇 번의 순간이었다.


우리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믿는다.

꼭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도, 그것을 '행복과 불행' 심지어는 '(소위 말해) 지랄과 성격'에까지 적용한다. 즉, 어느 한쪽으로 그것이 쏠릴 때, 반대되는 무언가가 작동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소는, 그렇게 정해진 질량을 가지고 좌우, 위아래로 그렇게 왔다 갔다 하고 있는지 모른다.


다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고 우리의 삶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나 유심히 봐야 한다.

삶의 '역설'을 맞이했다면, 그 반대급부를 알아차리고 이내 '중심'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 다시 말해, 삶의 '역설'은 어서 '중심'을 찾아가라는 신호다.


누가 그 '중심'으로 잽싸게 찾아가느냐.

그리고, 그 경계의 면에서 빛과 어두움을 함께 보고 논할 수 있을 때, '찰나'라 할지라도 우리는 '메타인지'를 할 수 있게 된다. 한 차원 높은 생각과 지각. 그리고 깨달음.


과연, 그것은 인문학이 주는 선물이다.

살아가는 와중에, '역설'이 찾아온다면 그렇게 그 '역설'을 활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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