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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un 21. 2020

나는 때로 아내에게 작업을 건다

아내에게 하는 '작업'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하는 '작업'인 것이다.

"어디야?"
"작업 중이야!"


당대 최고의 제품.

그리고 당대 최고의 모델이 나와 화제가 된 광고에 많은 것이 함축된 단어가 나온 적이 있다. 이 '작업'이란 말은 동시대의 어느 다른 한 연예인이 유명 토크쇼에 나와, '이성을 꼬신다'를 '작업'으로 표현하면서 말 그대로 대유행어가 되었다.


아마도, 이 광고를 모르는 요즘 세대도 누구에게 '작업을 건다'라는 표현을 들으면 대략 무슨 이야기 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결혼 후의 변화


결혼 후엔 많은 변화들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는 이제 다른 이성에게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젊은 날의 '작업'은 성취이자 목표였다. 누군가를 내 사람으로 만든다는 희열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니까.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나면 다른 누군가에게 작업을 하여서도 안되고, 할 여유도 없다. 

두 남녀가 만나 핑크빛 세상만 살아갈 줄 알았는데, 아무리 둘이 핑크빛이라고 하여도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온갖 색깔들이 넘쳐나고, 태어나서 보도 못한 삶의 색을 맞이하다 보면 '삶은 만만한 게 아니구나'라고 깨닫는다.


게다가, 서로 뜨거운 남녀 역할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남편과 아내, 사위와 며느리.

그리고 가장 정점에 이르는 아빠와 엄마라는 부모 역할을 맞닥뜨리다 보면 삶은 정말 급변한다. 다른 사람에게 작업할 힘은 사치다. 그럴 힘이 있으면 우리 가족 어떻게 잘 먹고 잘 살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 많은 역할을 해내는 데에는 '작업'의 몇십, 몇 백배의 힘이 들어가므로.


그러나 여전히
나는 남자고, 아내는 여자다


그러나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나는 남자고 아내는 여자라는 것이다. 아무리 다양한 역할이 생겨난다 하더라도 남녀 간의 애틋함은 부부의 필수 덕목이다. 손만 대도 뜨겁던 사랑의 온도가 낮아졌다고 사랑이 끝난 게 아니다. 사람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 온도에서 마음이 가장 편하다. 


바꿔 말하면 그 온도는 뜨거움과 차가움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때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때로 아내에게 '작업'을 건다.

남녀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삶엔 설렘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 가정은 더 단단해진다. 


다른 역할도 중요하지만 (남녀라는) 본질적인 역할이 흔들리면 안 되는 이유다.


아내에게 하는 '작업'들


그래서 내가 아내에게 하는 작업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간혹 달콤한(이라고 쓰고 낯간지러운이라는) 말을 한다.


사랑은 원래 낯간지러운 말로 시작되고 완성된다.

연애 시절의 모든 대화는 주옥같은 명대사들이었다. 그러나 결혼 생활에서 그 말들은 외계어가 된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삶을 살아야 하기에 대사를 칠 기회가 별로 없다. 더불어, 나이가 들면 (건강상) 너무 달콤한 것은 피해야 한다. 


다만, 그럼에도 적당한 당분은 삶을 아름답게 한다.


(아내가 아프다는 말에) "아프지 마, 아프려면 내 허락 맡고 아파."라던가.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는 아내를 보며) "오늘 좀 예쁘네?"라던가.


간혹 툭툭 던지는 달콤함의 낯간지러움이 상당하지만, 그 상당함의 정도가 아내를 미소 짓게 만든다.

살찔까 봐, 건강에 안 좋을까 봐 당분을 멀리하는 어른이 되었지만 그래도 어느 하루는 마음껏 단 걸 먹고 싶은 날이 있지 않은가.


둘째, 맛있는 걸 (예고 없이) 사준다.


연애의 즐거움은 뭐니 뭐니 해도 맛집이었다.

금강산도, 연애도 식후경. 맛집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알아내면, 어김없이 그 집을 방문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아내의 환심을 사기 위해 퇴근길에 마카롱이나 조각 케이크를 사 가거나 해물찜이나 회, 곱창을 하루 날 잡아 예고 없이 먹자고 하면 아내의 얼굴이 환해진다. 예전보다는 빨리 배가 불러 많이 먹지 못하고, 둘만의 시간이 아닌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지만 어쨌든 마음을 얻는 데는 여전히 유효하다.


셋째, 이야기를 (무조건) 들어준다.


여: 아니, 우리 부장님이...
남: 뭐? 부장님이 잘못했네!!!!

(위의 예처럼) 남자는 무조건 자신의 여자 편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 이유 따위는 없다. 그냥 그래야 한다. 


가끔 아내는 퇴근한 내게 와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회사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었거나 힘든 하루였다면 그 이야기를 듣는 게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귀담아들으려는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아이들 이야기인데, 그 마음이 존경스럽고 예뻐서다.


결혼 전에는 아내가 아이들을 이렇게 잘 키울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저 나에겐 이성이자 여자였으니 결혼 이후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잘 해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많이 고맙다. 


아내가, "언제 언제까지 아이들을 학원에 안 보내는 게 맞겠지?"라고 말하면, 난 "응, 그게 맞지. 잘 생각했네."라고 말한다.


본인이 잘 판단한 것 같다고 안도하는 그 모습을 보며, 내 마음은 편해지는 것이다.


결혼은 연애의 끝이 아니다.
또 다른 연애의 시작이다.


"결혼은 연애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연애의 시작이 되어야 한단다."

- 스테르담,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中 -

결혼은, 또 다른 연애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글로도 남겼으니까. 흔히들 결혼한 상대를 '이미 잡은 물고기'라고 말한다. 우리가 '수저'가 아닌 것처럼, 배우자는 '물고기'가 아니다. 


나는 결혼을 단순한 '결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애라는 유종의 미가 결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건 그 결혼생활을 어떻게 이어가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최선을 다했는데도) 맞지 않고 삐걱거리는 관계가 지속된다면 하루라도 빨리 각자의 인생을 찾아가는 게 맞다. 그게 아니라, 마주 보던 시선을 같은 곳으로 모아 잘 살자고 마음먹었다면 또 다른 연애를 할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즉, 결혼은 또 다른 시작인 것이다.

굳이 결말이라고 칭해야 한다면 나는 그것을 '열린 결말'이라 할 것이고.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기준은 따로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살아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삶의 역할과 방식이 결정된다. 그 결정에 후회는 없다. 나도 아내도 묵묵하게 그 역할을 잘 해내자고 매일 눈빛과 말과 행동으로 마주한다.


아내가 웃으면 나도 좋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좋다. 아내에게 하는 '작업'은 결국 우리 가족 모두에게 하는 '작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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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모음]

'견디는 힘' (견디기는 역동적인 나의 의지!)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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