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면 좋은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삶이 어디 그런가. 호락호락하지 않음은 삶의 오묘한 매력임을 잊지 말라는 듯, 삶은 많은 시행착오와 오해 그리고 시기와 질투를 내게 가져다주었다.
그럼에도 난 글쓰기의 순기능을 믿는다.
반대급부로 생겨나는 어리둥절한 것들을 뒤로하고, 굳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의 무게를 재어 본다면 단연코 좋은 쪽이 좀 더 무겁다는 결론이다.
글쓰기의 좋은 점, '질문!'
그러니까 좋지 않은 것들을 다 상쇄하고도 남을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질문'이다.
글쓰기를 시작하고서 난, 이전엔 묻지 않은 것들을 자주 묻는다. 때론,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거나 높은 수준(?)의 질문을 던진다는 것에 놀라기도 한다. 그 높은 수준의 질문은 바로 일상에 대한 질문이다.
질문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보지 않을 때 일어 난다.
그리고 당연하게 보지 않는 그 순간이 바로, 내가 바로 이전의 나보다 한 단계 수준이 오른 때다. 이 순간을 득달같이 알아차려야 한다. 그 순간을 만끽해도 좋다. 아, 만끽하기 전에 그 질문을 메모하는 것이 좋다. 삶의 인사이트는 휘발성이 강해서 단 몇 초만 지나도 사라지고 만다.
인문학의 중요성을 누구나 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지 혈안이 되어 있다. 고전을 읽고, 미술 작품을 해석하고 클래식을 들어야 한다는 정서가 가득하다.
그러나 인문학의 처음과 끝은 바로 '왜'라는 질문이다.
우리는 왜 사는가.
우리는 왜 먹는가.
우리는 왜 쓰는가.
왜 사랑하고, 왜 미워하고, 왜 시기하고, 왜 질투하고, 왜 이별하는가. 당최 알 수 없는 삶의 의미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헤매고 또 헤맨다.
그래서 난 가끔 명치 끝에서 올라오는 천불의 억울함을 토해내곤 한다.
왜 태어났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어떤 단서나 답도 없이 그저 살기 위해 살아야 하는 존재로서, 질문이라도 던지지 않으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다.
물론, 이러한 억울함과 질문의 포효는 글쓰기를 하고 나서다.
글쓰기 전에는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았다.
그러나, 이젠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나는 비로소 살아낸다.
나는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질 것이다.
답이 찾아지지 않으면 질문을 바꿀 것이고, 그럼에도 뭔가가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그저 쓸 것이다.
더불어, 어느 누구 한 사람이라도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의 질문을 외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질문을 멈추지 않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