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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ug 05. 2020

사오십춘기

하나도 흔들리지 않으려는 그 마음을 오히려 나는 경계한다.

나는 '사오십춘기'를 믿는다.

서점에 만연한 40대와 50대에 관한 글과 책들이 이를 방증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읽힌다는 이야기는 수요와 공급이 있단 뜻이다.


흔들리는 나이는 글을 토해낸다. 

모든 나이가 그러하겠지만, 20~30대가 내어 놓는 글이 미래에 대한 걱정과 방황이라면 40~50대가 적어 내려가는 글은 깨달음에 대해서다.


그런데, 그 깨달음은 고상하지만은 않다.

어쩌면 20~30대보다 못한 고민이나 방황도 포함되어 있음을 나는 고백한다. 철이 들어야 하는데, 철이 들지 않는 고민부터 아등바등 살아봤자 결국 내 뜻대로 되는 건 거의 없다는 깨달음.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다는 깨달음을 머리로 떠올리지만 당장 먹고살아야 하는 강박과 조급함은 안정되어가는 존재를 또 한 번 더 흔들어 놓는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흔들린 정체성.

되지 말아야지 했던 사회적 괴물이 된 나를 발견하면, 사오십춘기의 그것은 사춘기의 것 이상이다. 이쯤 되면 안정되었어야 할 정체성이 아직도 자리를 잡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적 박탈감과, 지금도 이러고 있다는 자괴감이 마음과 정서에 직격탄을 날리는 것이다. 게다가, 남들은 자리를 잡고 있는데란 '비교'가 개입되면 그야말로 어둠의 구렁텅이 속으로 빨려 든다.


누가 40대와 50대를 일컬어 '불혹'과 '지천명'이라 했나.

기대 수명이 50~60세인 그때 만들어진 명칭들이, 지금의 나를 불편하게 한다. 그러니까, 혹하지 않고 하늘의 명을 깨닫는 나이란 이 뜻은, 완성형이 아니라 과정형이다. '혹하지 마라!', '하늘의 명을 깨달아라!'란 명령문으로 들리는 이유다. 나는 아직 그러하지 못하므로.


한 마디로, 정신 차리라는 이야기.

사오십춘기에 이르러, 역시 나는 철이 덜 들었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흔들린다는 건 살아있다는 것임을 이내 깨닫는다.

혹해도 보고, 하늘의 뜻은 모르겠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는 마음이라면 굳이 그 어떤 나이의 개념에 나를 욱여넣고 싶지 않다. 


내가 해야 하는 최소한의 책임은 다하되, 하고 싶은 것을 찾아 헤매는 마음.

그 과정에서 흔들리는 것이라면 나는 사오십춘기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하나도 흔들리지 않으려는 그 마음을 오히려 나는 경계한다.

설령, 후일 육십춘기를 지나 팔십춘기를 맞이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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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모음]

'견디는 힘' (견디기는 역동적인 나의 의지!)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지 못했던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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