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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ug 09. 2020

나는 지난날 선택의 결과일까

'지금의 선택'이 나를 구한다.

'선택'이란 말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엇을 선택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게 중요하단 걸 알면서도.

후회는 언제나 내 주위를 맴돌고, 어느 하나라도 내뜻대로 되지 않으면 기어코 나를 넘어지게 할 절망이 도사리고 있다.


어젯밤에 먹은 라면부터, 지금 잘 나가는 기업의 주식을 미리 사지 않은 것까지.

또는 내 젊은 날의 그때에, 하지 않은 선택에 대한 자책과 지금도 우물쭈물하고 있는 나에게로의 실망감마저도.


했어야 하는 것들과, 하지 말아야 했던 것들 사이 그 어느 중간에서 나는 오늘도 서성인다.

그것들 안에 매몰되었다는 기분은 그렇게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무거운 기분이 되는데, 때론 기분이 '감정'이 되고 '인생'이 되는 결과를 맞이 한다. 마치, 비가 오는 흐리고 눅눅한 날씨의 하루가, 남은 364일을 규정하는 것처럼.


물론, 365일 내내 쨍쨍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는 걸 이제는 받아들일 나이가 되었다.


그렇게,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오늘의 나는 그 선택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뭔가 영 개운하지가 않다. 내가 선택을 했거나, 또는 내가 선택을 하기도 전에 무언가에 의해 선택이 이루어진 것도 있을 텐데. 더더군다나 선택의 결과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 대부분일 텐데.


나는 왜, 지난날 선택의 결과가 나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인 것이 삶이라 믿는다. 그런데, 나는 반대로 부분 부분을 모아 전체보다 못한 값을 내어 놓으며 나를 괴롭히고 있다.


젊은 시절의 자존감은 '비교'로 무너지고, 중년의 자존감은 '자책'으로 쪼그라든다.

이루고 싶었던 것들보다 작은 성취, 되고 싶었던 사람보다 초라한 자아, 그랬어야 했거나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선택에 대한 후회까지. 울분에 격분해 지금을 박차고 나가 무언가를 변화시키고 싶지만, 초라해진 몸뚱이와 나를 바라보는 가족을 생각하면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앞에 나는 그 발걸음을 멈춘다.


자,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하나부터 셋까지 세어 보자.

하나. 둘. 셋. 숨을 고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 나는 숨을 쉬고 있구나. 존재하고 있구나. 지금 방금 나는 셋을 세자고 '선택'했구나.


우리는 당장 '행복'을 '선택'할 수 없다.

나는 행복하기로 결정했다는 말은 온당치 않다. 다만, 어느 길목에서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이 행복에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까, 지난날의 선택에 대한 결과로 나를 한정 짓기보단 지금 내가 무엇을 선택할지를 돌아보기로 한다.

뻔한 말 같지만, 선택의 순간은 그렇게 뻔하게 온다. 뻔한 것들을 허투루 다루다 놓쳐버린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젊은 날의 시간보다 더 빠르게 흐르는 지금, 깨달음의 농도는 짙어야 한다.


그 농도를 조금 더 높여야겠다고, 나는 다짐한다.

그것이 바로, 과거의 선택 속에 갇힌 나를 구할 수 있는 '지금의 선택'이자 '최선의 선택'이다.


결국, '지금의 선택'이 나를 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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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모음]

'견디는 힘' (견디기는 역동적인 나의 의지!)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지 못했던 네덜란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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