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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ug 16. 2020

중년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나는, 그렇게 나의 죄를 사한다.

살다 보면 무언가에 '빠졌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 느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내가 원해서 빠진 것'과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빠진 것' 이 둘을 말한다. 물론, 예외는 있다. '사랑'은 그 둘을 충족하기도 하고, 어느 하나에 해당될 수도 있으니까.


어찌 되었건, 무언가에 빠졌다는 건 헤어 나오기 쉽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빠진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내가 원해서 빠졌다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을 즐기겠지만, 원하지 않았는데 그랬다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자 삶의 고단함 그 자체일 테니까.


대표적으로, 나에겐 '나이'가 그렇고 특히 '중년'이라는 굴레가 더 그렇다.

스무 살이 '성인'의 상징인 것처럼. 갓 스무 살이 되어도 20대라는 범주에 묶이고, 바로 어제와는 다른 취급을 받는 존재가 된다. 중년도 마찬가지. 그 범주에 들어가는 순간, 왠지 모르게 삶은 초라해지고 그 범주와 영역은 쪼그라든다.


'입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는 말이 꼭 중년을 말하는 것 같아 나는 소스라친다.

아프지 않던 곳이 아프고, 멀쩡했던 신체 어느 곳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서러움.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출구가 없는 중년이란 루프에 빠져 버린 것이다.


삶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고단함의 무게도 마찬가지다.

결혼을 했거나,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나이에 걸맞는 것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고단함은 다르지 않다. 비례하진 않았더라도, 어찌 되었거나 나이와 함께 얻어진 것들에 대해 중년은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책임감이 가장 고조를 이루는 것도 바로 이 때다.


지금 무너지면 이도 저도 아닌 삶이 되는 순간.

대단하진 않아도, 그동안 쌓아 올린 것들이 무너지면 내 존재가 사그라들 것이라는 불안감.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중년이라는 죄에 빠진 걸까.

모든 사람은 중년에 빠질 수밖에 없으니 과연 '원죄'라는 게 있긴 있나 보다라며, 나하나만 중년에 접어드는 게 아니란 사실에 안도 아닌 안도를 한다.


물론,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가면 이 죄의 아픔은 더 커질 것이다.

노후대책을 하지 않았다면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이러한 불안감이 지금의 중년을 더 힘들게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 생각해보니 과연 그렇다.


사람의 삶을 통틀어 삶이 무겁지 않고, 불안하지 않았던 적이 있을까.

아마 각자의 삶, 각자의 나이, 각자의 위치에서 그 삶의 무게와 고단함은 가장 무겁고 클 것이다.


그러니, 지금 중년에 이르러하는 나의 투정은 죄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저, 삶의 고단함에 짓눌려 잠시 나온 탄식이라고 해두고, 나는 오늘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기로.


나는, 그렇게 중년이라는 나의 죄를 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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