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중년은 나에게 '우연'일까 '필연'일까.
'우연'과 '필연' 중.
그 무게를 따진다면 어느 것이 더 무거울까.
감이 떨어지길 바라며 그 아래 입을 벌리고 있는 삶과, 기어코 나무에 올라 감을 따려는 삶을 두고 볼 때 느껴지는 무게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 두 삶은 전제가 다르다. 전자는 유유자적하지만, 후자는 필사적이다. 전자가 배고픔을 걱정하지 않는 존재라면, 후자는 배고픔을 두려워하는 존재다.
나는 물론 '우연'의 삶을 선호한다.
설렘이 있기 때문이다. 우연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은 설명할 필요도 없고, 그 의미를 해석할 필요도 없다. 오는 게 오는가 보다, 가는 게 가는가 보다. 아무 생각과 걱정 없이 우연에 순응하며 살면, 얼마나 편할까. 날마다의 새로움에 얼마나 흥미진진할까. 미련 없이 다음 우연을 기다리는 삶이란 그야말로 설렘이다.
편하지 않은 내 삶이 '우연'을 바라고 있다는 내 생각을 자꾸만 드러낸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면 나는 물론이고 우리 모두는 '필연'에 끌려가는 삶을 살게 된다.
단적인 예가 '월급'이다. 월급은 우연이 아니다. 필연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감나무에 기어이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이미 감나무에 올라간 사람이 많아 내가 낄 자리가 없다면, 누군가를 끄집어 내려서라도 올라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 감이 없다면 나는 또 다른 나무를 찾는 '필연'의 과정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러니까, 삶의 무게는 '필연'의 과정에서 온다.
가만 앉아 무엇이 오고 가길 바라는 삶은 나의 이상(理想)이지만, 현실은 감나무라는 필연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하마터면 열심히 살뻔했다"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오히려, "하마터면 열심히 안 살뻔했다"라고 말해야 한다. 다른 이의 삶이 가볍다는 건 아니다. 오롯이 내 삶의 무게에 집중할 뿐이다. (그럼에도, 덜 열심히 살아도 되는, '덜 무거운 삶'엔 간혹 나의 부러움을 담아 보낸다.)
이미 나에게 딸려 있는 많은 것들로 나의 삶은 무겁다.
그러나, 그 삶은 내가 만든 '우연'과 '필연'의 결과다.
우연의 삶을 지향한다고 해서, 필연의 결과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마음은 없다.
그리고 나는 필연의 과정과 결과를 후회하지 않는다. 삶은 무겁고 고단하지만, 그 무게가 나에게 묵직함을 선사하고 중심을 잡게 한다. 필연을 만들어내려 고군분투하다 보면, 기대하지 않았던 우연이 생기기도 한다.
중년의 무게는 참을 수 없다.
그러나, 참을 수 없으므로 나는 움직인다.
그 움직임들 속에서 나는 숨 쉬고 있음을 느낀다.
결국, '우연'이 '필연'이고 '필연'은 '우연'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중년은 나에게 '우연'일까 '필연'일까.
그 둘을 합쳐 그것을 '운명'이라 한다면, 나는 흔쾌히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