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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ug 16. 2020

글쓰기와 걷기의 공통점

그 둘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

힘들고 우울한 시간을
견디고 이길 수 있는 첫걸음


힘들고 우울한 시간을 견뎌내야 할 때가 있다.

그러한 상황은 대부분 내가 의도한 게 아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 일어날 때 우리의 마음은 대부분 무기력해지고 어두워지니까. 그런데, 어찌 되었건 그것을 견디고 이겨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나다. 그리고 모두 저마다 각자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무턱대고 버티거나, 어떤 이는 전문가를 찾거나 약을 먹을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먹는 것으로 풀거나 쇼핑을 하며 발버둥을 칠 것이고.


돌아보면 나 또한 딱히 그 어떤 방법이 있진 않았다.

미련하리만치 그저 참거나 괜한 곳에 화를 내거나, 회피하고 도망가는 방법을 통해 조금씩 내성이 길러지고 이런저런 방법을 찾아왔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깨달은 한 가지 진실이 있다면, 나에게 찾아온 힘들고 우울한 마음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마주하고 진심으로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픈 것도 나고, 이겨 내야 하는 것도 나고, 괜찮아지는 것도 나이기 때문에 그 답답한 이유를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Valley of Chaos' by 'Leading Change Class'


'변화관리' 전문가들에 따르면 사람은 어떤 혼란이 왔을 때, <'부정'-'저항'-'중간점(수용)'-'탐험'-'몰입'-'새 출발'>의 단계를 거친다고 하는데, 굳이 이러한 이론에 기대지 않아도 우리는 어떤 위기를 마주 했을 때 부정과 저항의 마음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안다.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 위기와 혼란을 회피하려고 하는데 결국, '마음의 반등'이 일어나는 지점은 바로 '중간점(수용)'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니까 '새 출발'이라는 정상에 오르기 위해선 '부정'과 '저항'의 시간을 줄이고, 내게 일어난 일들을 받아들이는 것(수용)이 회복을 위한 첫 단계라는 것이다.


받아들임의 미학, '글쓰기'와 '걷기'


나는 '글쓰기'와 '걷기'의 시대를 읽는다.

발생한 시점의 차이는 차치하고, 왜 이 두 가지가 대세가 되고 있는지를 고찰한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공통분모를 뽑아내 보자면 아마도 사람들은 그 어떤 '위로'가 필요한 게 아닐까. 힘들고 우울함은 삶이라는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행할 때 일어날 수밖에 없는 마음이니까.


지난날, 내가 극도로 힘들고 우울했던 시간을 어떻게 지나쳤나를 돌아보니 과연 그것은 '글쓰기'와 '걷기'였다.

그 둘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글쓰기'와 '걷기'를 시작하기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한다. 결국, 내가 나를 응원하고, 내가 나를 살아가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둘은 살아가는 데 있어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효과가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좋은 방법들. 나는 이보다 좋은 방법을 아직 알지 못한다. 

'부정'과 '저항'으로 어둠의 골짜기를 깊이 파내려 가던 때, 마침 나는 다섯 번째 저서인 '견디는 힘'을 집필하고 있었는데 그 글들을 써 내려가면서 내가 받은 위안과 용기는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다. 그와 함께 했던 '걷기' 또한 나를 더 강인하게 했는데 그 둘은 분명 긍정의 공통점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깊이 생각하고, 몸소 느낀 '글쓰기'와 '걷기'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속도에 대항한다.


세상은 속도에 미쳐있다.

그 안에 있는 우리도 그렇다. 빨리 돈 벌고, 빨리 성공하는 방법에 혈안이 되어 있다. 세상엔 나보다 빠른 사람과 나보다 느린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나보다 느린 사람을 보며 덜 불행하다는 안도를 느끼지만, 나보다 빠른 사람을 보며 이내 상대적 박탈감에 빠진다.


방향에 관계없이, 무조건 빨리 내달려야 한다는 정서가 가득하다.

옆 사람이 뛰니 영문도 모른 채 나도 뛰는 현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서식하는 사슴과인 스프링복은 놀라거나 흥분하면 다리를 뻣뻣이 세우고 연속하여 수직으로 3.5m까지 튀어 오르는 '프롱킹(Prongking)'을 한다. 그러다 낭떠러지가 나타나도 서지 못하고 그대로 떨어지는 최후를 맞이한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라는, 목숨을 바친 스프링복의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걷기'는 속도를 내선 안된다.

'걷기'는 속도에 대항하고 위배해야 성립된다. 삶의 뜀박질, 고속 승진, 최고 속도의 교통수단, 5G 이동통신 망등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것들에서 속도를 줄이고 줄이고 또 줄여야 걷기가 가능해진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남의 속도를 따라가려는 마음의 속도를 줄이고 줄여 준다. 펜으로 쓰거나, 타자를 치는 속도엔 한계가 있다. 더불어, 왜 써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쓰려하는지에 대한 고찰이 없으면 글쓰기는 이어지지 않는다. 영혼 없이 좀비처럼 속도에만 혈안이 된 몸뚱이에게, '글쓰기'는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질문을 퍼붓는다.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하다 보면, 삶의 속도는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글쓰기'와 '걷기'는 기본적으로 속도를 내는 게 아니라, 속도를 줄임으로써 성립되고 삶의 본질적인 것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둘째, 시선이 내부로 향한다.


'걷기'를 하다 보니 마음이 많이 안정된다는 것을 느낀다.

마음의 안정을 알아차린다는 건, 시선이 내부로 향한다는 증거다. 우리 삶은 척박하므로, 대부분 우리의 시선은 외부를 향해 있다. 외부의 공격, 외부의 변화, 외부의 자극 등. 날아오는 것들을 방어해야 하고, 그것들과 어우러져 살아가기 위해선 남 탓, 세상 탓을 하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계속되다 보면 삶은 이내 허탈해지고, 남는 게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런데, 천천히 걷다 보면 이해가지 않던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나를 공격한 사람들, 내가 열심히 했는데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이런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드니, 나는 나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글쓰기'도 이와 같은데, 이리저리 외부를 향해 난사하던 마음 총의 방아쇠 멈추고 펜을 잡는다.

과연, 나는 누가 적이고 또 무엇을 무찔러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마음의 총알과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던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선 사색과 고찰을 한다. 질문을 던진다. '왜'라는 물음엔 마력이 있다. 외부로 향한 그 무거운 시선을, 나에게로 향하게 하는 힘.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아, 나라도 그러했겠구나.
아, 내가 이런 존재로 인식이 되었겠구나.
아, 이런 일이 일어난데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데에는 이러한 의미가 있구나.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깨닫는 과정에서 나는 스스로 치유된다.


'걷기'와 '글쓰기'는 마치, 그렇게 '흐르는 물'과 '거대하게 고여 있는 물'을 닮았다.

'흐르는 물'에는 '씻김'과 '치유'의 힘이 있고, 바다와 같이 '거대하게 고여 있는 물'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정화'한다는 점에서.


외부에서 나에게로 시선이 흐르고, 모든 것을 받아 내는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회복되어 가는 것이다.


셋째, (마음과 몸이) 건강해진다.


나는 격렬한 운동만이 효과가 있다고 믿어왔다.

땀을 흘리고, 몸이 녹초가 되어야 그나마 좀 운동을 한 것 같다는 생각. 그래야 살도 빠지고 건강해진다고 믿었다. 그러다, 격렬한 운동을 하다 다리를 다쳐 찾은 병원에서 이제는 이런 운동할 때가 지났으나, 걷기나 가벼운 운동 위주로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이가 들어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운동도 하지 못한다는 서글픈 생각이 몰려왔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깨달음은 물론 정적으로 보일지 모르는 걷기를 통해 나는 격렬한 운동을 할 때와 다르지 않은 희열을 느낀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

뭔가 대단한 걸 써야 하고, 미친 필력으로 써 내려가는 것만이 글쓰기라 생각했던 때가 있다.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건, 결국 남이 쓴 글보다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혼자만의 착각과 검열이었을 뿐. 글쓰기는 써 내려가면 되는 것이고, 그 어떤 기준과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글쓰기는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어 놓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내 마음을 내어 놓는 것엔 필력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내 마음을 바라보고, 그 안으로 깊이 헤집고 들어가는 질문과 고찰이 필요할 뿐.


그러니까, 글이 써지지 않을 때 돌아봐야 하는 건 필력이 아니라 내 생각과 마음이다.

이미, 우리 마음속엔 내어 놓을 것이 참 많지 않은가. 격렬한 운동으로, 미친 필력으로 다가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내어 놓을 것들이 차고 넘친다. 이것을 알아챌 때, 글쓰기는 이어진다.


결국, 이 과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몸은 건강해진다.

무리하지 않게, 나를 돌아보며 꾸준히 하는 걷기와 글쓰기가 주는 선물은 이미 보장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어느 정도 각자의 인생을 살아와서 눈치챘겠지만, 삶은 내 뜻대로 되는 것보단 그렇지 않은 게 더 많다.

그러니까, 삶은 행복하고 마냥 기쁜 날보다는 이해되지 않고 무기력한 시간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볼 때, 뜻하지 않은 일들이 내게 일어났을 때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알게 된다면 삶은 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의미'와 '깨달음'은, 조금이라도 더 내 뜻을 펼칠 수 있는 에너지가 될 테니까.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투정 부릴 나이는 지났고, 그럴 시간이 있으면 내게 일어난 일들을 포용하고 그것에서 의미를 찾아 진짜 네가 하고 싶은 일과 꿈을 펼치라고 '글쓰기'와 '걷기'는 오늘도 내게 속삭인다.


그 둘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스테르담 글쓰기 클래스(VOD)

스테르담 글쓰기 클래스(오프라인/ 온라인라이브)

스테르담 인스타그램


[저서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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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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