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Oct 13. 2020

나의 가치는 내가 정한다.

그 가치는 정해지지 않는 것이라 정의한다.

주식엔 가치투자란 말이 있다.

말 그대로, 가치가 있는 기업을 골라내 중장기적으로 투자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게 쉽지 않다.

가치 있는 기업을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주가 그래프의 오르고 내림을 온전한 마음으로 바라볼 배짱이 몇 없기 때문이다. 즉, '가치'는 결국 상대적인 것이 된다. 순간순간 믿음의 크기에 따라 그 가치는 쪼그라들고 부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 반복 안에서 '가치'의 가치는 소멸한다.


그러다 문득, 나는 나의 가치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이런. 대답할 준비가 되지 않았단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자, 그렇다면 나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절대적으로 볼 것인가. 그러니까, 누구 보단 낫거나 못하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돈으로 환산해 얼마라는 절대적인 금액을 내어 놓을 것인가.


애매할 땐 그 뜻을 먼저 알아보는 게 좋다.

'가치'란 말속엔, '중요성, '쓸모', '효용'의 속성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중요한 사람인가?', '쓸모 있는 사람인가?', '효용이 있는 사람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에 대한 대답을 하려는 순간, '내가 그런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나?'란 생각을 나도 모르게 했다.

순간적인 그 질문을 뒤집어 보면, 나는 나의 가치를 누군가 정해줄 거란 생각을 하며 살아온 것이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고 스스로에게 미안했다.

지금까지 먹어온 나이가 몇 개인데. 나는 아직도 나의 가치를 스스로 책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내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가치주'다.

나는 나에게 투자를 해야 한다. 그것도 평생을 말이다. 더불어, 투자하는 내내 나는 나를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의 와중엔 고점도 있고 저점도 있을 것이다. 고점일 땐 겸손을, 저점일 땐 응원을. 내 투자가 성공을 하려면 내가 투자한 대상과 나는 한 몸 한 뜻이 되어 긴 호흡으로 앞을 바라봐야 한다.


그런데 돌아보니, 나는 내 가치에 대한 확신이 별로 없던 것 같다.

고점일 땐 어설픈 오만을, 저점일 땐 자책을 하며 무던히도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내렸다.


왜 그랬을까?

왜 그러고 살았을까?


고백하건대, 사실 나는 내 가치에 대해 묻거나 대답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정해진 틀이나 생각의 굴레에 갇혀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만큼, 알고 있는 만큼, 상처 받지 않을 만큼만 스스로에게 투자를 해온 것이다.


스스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과감하게 벌이고 투자하고 도전했을 텐데.


갑작스레 울컥함이 몰려온다.

이것은, 그동안 나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은 미안함과 무언가 알을 깨고 고개를 빼꼼히 내어 놓은 그 순간의 감정이다.


이제야, 내가 나의 가치를 정하자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 가치는 정해지지 않는 것이라 정의한다.


나는 나를 믿고 길게 간다.

'가치주'의 성공은 기다릴 줄 아는 자의 몫이라 확신하며.




스테르담 글쓰기 클래스(VOD)

스테르담 글쓰기 클래스(오프라인/온라인라이브)

스테르담 인스타그램


[저서 모음]

'견디는 힘' (견디기는 역동적인 나의 의지!)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지 못했던 네덜란드의 매력!)

매거진의 이전글 듣던 말을 하게 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