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들은 나이와 때를 달리하여 온다. 나는 그 설렘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곤 한다. 설렘은 일종의 감정인데,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감정을 얻으려 모든 걸 걸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사랑이 그렇고 또 행복이 그렇다.
감정은 오감과 맞닿아 있다.
오감은 말 그대로 보고, 듣고, 맡고, 느끼고 맛보는 것이다.
요즘 나에게 설렘은 맛보는 것에 있다.
사랑은 설렘보다는 편안함이 되었고, 행복은 들뜸이 아니라 안정된 무엇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작 앞에 설레는 맘도 없지 않지만, 나이와 처지가 있다 보니 이리저리 앞뒤를 재다보면 예전만 한 설렘은 아니다. 그러니, 이젠 음식 앞에 설레는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기로 했다.
실제로 좋아하는 음식 앞에서 나는 설렌다.
설렘은 무엇인가? 마음이 가라앉지 아니하고 들떠서 두근거리는 그 느낌이다. 좋아하는 음식 앞에서 (그것도 허기진 상태라면 더) 들뜨지 않을 사람들이 있을까? 좋아하는 음식 배달이 왔을 때 물개박수 치며 받아 드는 경쾌함이 그 모든 걸 설명해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나는 김치, 돼지고기 그리고 밥 앞에서 설렌다.
이런 완벽한 조화를 나는 본 적이 없다. 한국인의 삶이 녹록지 않지만, 이 순간만큼은 한국인으로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배고플 때, 그 세 가지를 숟가락에 한데 얹어 한 입 크게 넣은 경험들을 떠올려보면 좋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새 입안에 군침이 모여든다.
재밌는 건 그 세 가지 모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금단 현상이다. 나는 한국인이 김치에만 그런 현상을 가진 줄 알았다. 예전에 중동 출장을 갔을 때 느낀 건데, 돼지고기를 오래 먹지 않아도 금단 현상이 일어난다. 중동은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는 지역이라 장기 출장 내내 소고기나 닭고기를 먹었는데 어느새 꿈에서 돼지고기 먹는 꿈을 꾸는 나를 발견한 적이 있다.
밥도 마찬가지. 나라와 지역마다 쌀의 질과 모양이 다르니, 말 그대로 집밥이 그리울 적이 참 많았다. 그래서 내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면 아내는 언제나 김치, 돼지고기 그리고 하얀 밥을 함께 준비해준다. 서로 부탁하거나, 묻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러나 설렘은 한순간이란 걸 나는 안다.
감정은 언제나 순간의 스침과도 같기 때문이다. 설레던 오감은 숟가락의 움직임에 반비례하여 안정된다. 첫 술로부터 정신 차려보면 비로소 가족이 보인다.
김치, 돼지고기 그리고 하얀 쌀밥.
이 대단하지 않은 것들로 설렐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함께 그것을 먹을 수 있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작은 행복을 느끼기 위해선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마음의 여유는 편안함에서 온다. 내 편안함의 근원은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