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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Feb 02. 2021

성실함은 끼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생각보다 성실한 존재다.

근 20년 전이다.

나는 신입사원이었고, 회사는 갓 입사한 사원들에게 영업이라는 직무를 의무 할당했다. 영업이 근간이라는 회사의 방침이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면 사람들에게 박수받는 게 회사 생활이라 생각했던 때였다. 그러나 생각보다 빨리 정신을 차렸다. 영업의 현장은 삶의 쓴 맛을 맛봐야 하는 곳이 아니라, 세상의 쓴 맛을 들이마셔 뒤집어써야 하는 곳이었다. 


당시만 해도 세련된 영업은 있을 수 없었다. 

더더군다나 나에겐 동기들과는 달리 매장 관리가 아니라 없는 고객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소위 멘땅에 헤딩하기 영업 임무가 주어졌다.


붓고 마시고, 나를 한참 낮춰 접대해야 그 달의 목표를 간신히 채울 수 있었다. 

물론, 간신히라도 채울 수 있는 달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한 날이면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붓고 마시고 조아렸나를 회의하며 잠들고 다시 일어나 출근했다.


어느 날은 한 푼이라도 실적을 올려보겠다며 서울에서 저 남쪽 지방 어딘가로 달려간 적이 있다.

결국 거래를 거부한 그 부장님은 남루한 신입사원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저녁밥을 챙겨주셨다. 지글지글 익는 삼겹살 위로 술잔이 오가며, 자식과도 같은 나에게 그 부장님은 '끼, 깡, 끈, 꼴, 꿈'을 가지고 살라고 당부했다. 지금은 너무 흔한 말이 되어 아저씨가 툭 하고 던지는 차가운 충고 같지만, 그때 나에게 그것은 꽤 새로운 조언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술에 취해 그 다섯 글자를 꼬깃한 메모지에 삐뚤빼뚤 그러나 마음에 새기듯 정성 들여 적었다. 


최근 들어 보는 음악 경연 프로그램이 있다.

무명 가수가 나와 자신들의 이름을 밝혀 가는 과정을 그린다. 원래 유명하지 않거나, 유명했었는데 무명이 되었거나. 또는 유명을 꿈꿨으나 아직까지 무명인 사람들의 경쟁이다. 그중, 아이돌로 데뷔했으나 빛을 보지 못한 한 가수가 완벽한 춤과 노래로 심사위원들을 울렸다. 완벽한 춤과 노래, 그리고 단 한 번의 무대도 허투루 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그 모습에 모두가 감동한 것이다. 

"성실함이 끼가 될 수 있구나, 재능이 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심사위원이 나지막이 읊조린 심사평이다.


공교롭게도 눈물을 보인 심사위원은 모두 젊은 가수들이었다.

아마도, 자신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도 이렇게 고군분투하고 있는 무명가수를 보며 일종의 미안함을 느꼈을 수도 있겠다.


'끼'라는 말을 듣자, 나는 20년 전의 '끼', '깡', '끈', '꼴', '꿈'이란 말이 떠올랐다.

기억은 감정을 불러온다. 기억을 관장하는 뇌의 해마 옆에는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가 찰떡처럼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게, 기차 안에서 적은 그 다섯 가지 글자를 나는 실천하며 살아왔을까?

지금 나에게 있고, 또 지금 나에게 없는 건 무엇일까?


그러다 문득, 그 다섯 가지 글자를 하나로 뭉치면 그것이 바로 '성실'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실해야 그 다섯 가지를 이룰 수 있고, 그 다섯 가지를 이루려면 성실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어찌어찌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일종의 '성실함'일 것이다.

내가 원하는 만큼 나는 성실하지 못했지만, 어찌 되었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건 어느 정도 나는 성실하단 이야기다. 성실함의 정도를 재단하기보단, 이제껏 살아온 그 성실함을 나 스스로가 알아줘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생각보다 성실한 존재다.

아침 알람 소리에 우주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지구의 중력을 거슬러 몸을 일으킨다. 화성보다 멀게 느껴지는 출근길을 묵묵히 걸어 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내려 기어이 직장이라는 전장에 몸을 던진다.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은 펴질 새도 없이 또 다른 내일을 기약한다. 


이 모든 게, 성실함의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실함은 끼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끼로는 성실할 수 없다. 성실하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성실해야 우리는 '끼', '깡', '끈', '꼴', '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어렵지 않다.

우린 아직 살아 숨 쉬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성실한 것이다.

다섯 가지 것들을 누리며 살 자격이 있는 것이다.


나도, 당신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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