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지도 춥지도 않으니 걷지 않을 변명거리가 없다. 평생 걸을 걸 군대에서 다 걸었다 생각하여 걷는 건 딱 질색이었는데, 나이가 드니 한 걸음이라도 더 걷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든 탓도 있다.
사람은 좌뇌와 우뇌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둘 사이 신호가 활발히 오갈 때 좀 더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걷기'가 우리의 두뇌를 활발히 하는데 가장 간단하고 간편한 방법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걸어보니 실제로 그렇다. 소란하고 요란했던 머릿속 생각들이 잘 정리되어 글감으로 승화되는 그 순간들은 그야말로 희열이다.
걷는 게 좋아진 이유는 이러한 희열 말고 또 하나가 있다.
바로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직장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다. 가장 두껍고 가장 무거운 페르소나를 쓰고 하루를 보내면 머릿속은 뿌예지고, 마음은 너덜너덜해진다. 직장 안에선 참으로 무수한 일들이 벌어진다. 감정의 롤러코스터는 상상도 못 한 코스로 나를 내달리게 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빌런의 등장은 삶 자체를 당황스럽게 한다.
아주 조금의 보람과, 그보다 좀 더 많은 감사함.
그러다 그 둘을 합한 것보다 더 큰 수치심과 자책감은 하루 종일 나를 따라다닌다. 가면 뒤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말과 행동. 심지어는 누군가를 보며 저러지는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던 그 언행을 그 사람과 똑같이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 그 하루가 그토록 못내 서글프다.
그 서글픈 마음을 가지고 전철이나 버스에 오르면 바퀴로부터 올라오는 진동과 함께 그 서글픔이 물속의 흙처럼 마음을 흐려 놓는다.
그러나, 걷기를 하면 서글픔의 흙은 가라앉고 물은 점점 더 맑아진다. 나에겐 걷는 퇴근 길이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1189년 교황 알렉산더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성지로 선포하면서,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죄를 없애준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그래서 나는 걸어가는 퇴근길에서 내 마음의 서글픔과 수치심 그리고 누군가에게 했던 미안한 언행에 대해 죄를 사하겠다는 셀프 칙령을 선포했다. 사무실을 나서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나는 걷는다. 마음이 덜 소란해질 때까지 걷는다. 죄가 사해졌다고 느껴질 때까지, 서글픔과 수치심의 크기가 작아질 때까지 걷고 또 걷는다. 때론, 사무실부터 집까지 꼬박 걸어가기도 한다.
힘든 만큼 쓰고, 힘든 만큼 걷는 것.
나만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나의 마음을 돌아보고, 그것들을 글로 옮기는 그 과정은 정말로 내 마음을 정화하는 카타르시스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내일 다시 나는 마음이 무거워질지라도, 오늘 걸어 도착한 집에선 잠시나마 자유로워지자고 나지막이 읊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