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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15. 2021

과거는 명언, 오늘은 농담, 미래는 질문

그게 삶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더 편해지니까.

삶은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다


삶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다.

믿었던 것들이 나를 배신하고, 배신했던 것들이 이내 나에게 도움으로 돌아온다. 잘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여지없이 화살로 날아오고, 실패했다고 여겼던 것들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행복하다고 믿는 순간 불행은 떠오르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나는 희망의 불씨를 찾아내려 안간힘을 쓴다.


그러니까, 삶은 절대적으로 상대적이다.


이 상대성을 설명하자면, 그것은 '시간'과 '깨달음'에 기인한다.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들이 변한다. 물리적인 풍화부터, 심리적인 변질과 생각의 뒤바뀜까지. 심지어는 기억이 왜곡되어 같은 사랑을 해도 그 추억을 다르게 떠오르는 일도 발생한다. 나에게 좋았던 게 너에겐 상처였고, 너에게 아름다웠던 것이 나에겐 곤욕이었음을 시간이 지나면 토로하게 된다.


깨달음은 시간의 개념을 뛰어넘는다.

어찌 보면 시간의 풍화는 깨달음으로 인한 것일는지 모른다. '깨달음'의 어원은 '깨어서 그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다. 무언가가 깨질 때, 그 안에는 '의미'란 게 튀어나온다. 의미가 있고 없고가 깨달음의 기준이 되고, 동시에 깨달음의 유무가 시간의 절대성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을 틀린 이유는 바로, 그때는 나에게 의미가 있었고, 지금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의미의 부여


이러한 차원에서 나는 시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본다.


'과거'는 나에게 (맞춤형) '명언'이 된다.


지나간 모든 걸 떠올리면, 그것엔 만족, 후회, 아쉬움, 보람 그리고 그 외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다. 

그 모든 걸 모으고 모으면 '의미'가 되고, 그 의미를 잘 소화하면 나에겐 '깨달음'이 되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은 어찌할 수 없다. 과거로 돌아가, 나의 행동을 억제할 수 없고 꼴보고 싫은 상대방을 한대 후려칠 수도 없다. 기껏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그저 이불킥 정도다.


그래서 과거를 잘 곱씹으면, 그건 나에게 '명언'이 된다.

그것도 '맞춤형', '테일러메이드' 명언이 된다. 우리는 유명한 사람들이 이야기한 한 문장에 감동받고 동기 부여를 받곤 하지만 사실, 진정 나에게 필요한 명언과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특효약은 내 과거로부터 온 '명언'이다. 유명한 사람의 말은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만, 나를 일으켜 세우는 건 과거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만의 명언을 찾기 위해, 과거로의 여행을 떠난다.


'오늘'은 농담과 같다.


삶은 참 농담과도 같은 구석이 있다.

특히, 오늘이 그렇다.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하루를 맞이하다 보면 '장난 지금 나랑 하나'란 생각이 절로 든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기에 또는 나름 열심히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나에게 다가오는 풍파의 물결은 기대 이상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부터, 내가 의도하지 않은 일들에 대한 결과를 맞이해야 하는 것까지. 내가 바라는 것의 어느 일부분이라도 삶이 따라와 주면 좋겠는데 오히려 더 반대로 흘러가는 삶의 야속함은 거짓말과도 같다. 그저 피식 웃고 말 수 없는 오늘의 삶은 '농담'이다.


'삶', 특히 '오늘이라는 삶'의 농치는 수준과 기교는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미래'는 질문이다.


삶의 농이 지나치지만 과거로부터 명언을 얻고 오늘의 농담을 가만 들여다보면.

무언가 건질게 나올 것만 같다. '나올 것만 같다'라는 의구심을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건 바로 '질문'이란 생각이다.


질문할 때 비로소 내 미래는 밝아진다.

앞날이 두려운 이유는 어두워서다. 내가 당장 내일 로또 1등에 당첨된다면 또는 내일 당장 이 세상을 떠날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면, 미래가 두렵지 않다. 아마도 그것을 그저 받아들일 것이다. 단지, 기쁘게 맞이하느냐 슬프게 맞이하느냐의 차이일 뿐. 그러나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모르는 내일은 그야말로 불안이자 고통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내가 시간과 미래에 대항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그저 '질문'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이랬고, 오늘은 저랬으니, 나의 미래는 어떠해야 하는가. 오늘이라는 농담에 대해, 나는 어떻게 받아쳐야 할까.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순 없다.

그러나, 답을 모를 땐 질문을 바꿔 보는 것도 좋다. 질문을 바꾸다 보면 답이 나올 때도 있고, 또 어떤 질문엔 답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기도 한다.


'미래'는 '질문'이자, '질문'은 '미래'다.




어제는 아쉬웠고, 오늘은 허무하고, 내일은 어두워 불안하다.

삶은 그렇게 반복된다. 아쉬움과 허무 그리고 불안을 모으면 그것은 삶이 되고 곧 우리 삶에 유용한 힌트가 된다. 


과거로부터 오는 명언을 유심히 살피고, 오늘이 건네는 농담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

그래서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바로 내일도 내가 숨 쉴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 없이, 깨달음 없이, 의미 없이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나를 미워하지 않기로 한다.

지난날의 나도 깨달은 바가 있었을 것이고, 삶이 던지는 농담에 속수무책이었으며 지금의 나라는 미래의 나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을 테니. 과거에서 옮겨온 지금의 나라고 할지라도, 몰랐던 답을 알고 있는 건 아니며, 여전히 나는 미래의 나에게 질문을 전가하고 있으니.


나는 그저 돌아보고, 농을 받고, 질문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반복하기로 한다.

그게 삶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은 더 편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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