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충동적인 스토리는 언제까지일지. 끝이 있다는 게 믿기질 않는다.
가만히 앉아 공허한 하루를 보내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하루는 하늘마저 공허한 날이었다. 구멍 난 가슴에 오고 가는 것들 중 하나라도 부여잡고 싶었다. 머리를 지나 온몸을 휘감는 생경하고도 익숙한 생각과 번뇌들은 그렇게 내 마음을 관통하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붙잡으면 멱살이라도 잡아 내 공허함의 이유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가끔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제대로 산다는 것의 기준도 궁금하다. 그런데, 세상에 그런 '기준'이 있는가 싶기도 하다. 지금까지 난 그 어떤 답과 기준을 얻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삶은 이렇게 질문만 해대다 끝나는 것일지도.
공허함은 바로 이것으로부터다. 애초부터 불공평한 게임은 세상의 빛을 볼 때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그저 태어났을 뿐인데, 단 몇 분 몇 초도 예외 없이 삶은 나를 몰아친다. 왜 태어났는지 이유도 모르는데, 우선 살아야 한다. 우선 살아야 하는 존재는 질문할 여유가 없다. 아주 간혹 살만하다란 생각이 들어, 정신 차리고 질문해보지만 역시나 답은 없다.
코미디가 따로 없다.
그것도 아주 짙은 검은색의 코미디.
삶은 그렇게 충동적인 스토리다.
답이 없는 퀴즈.
극본 없는 희극.
자비 없는 전진.
나는 그 어떤 순간에 충동적인 내가 밉고 싫었는데, 이렇게 보니 그때의 충동적이었던 나는 참으로 합리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태어나, 답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의 삶 자체가 충동 아닌가.
어쩌면 나는 신이 저질러 놓은 수많은 충동적 결과 중 하나 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정답'은 없지만, 내게 맞는 '해답'은 있을 수 있다.
정답은 문제와 답을 일치시켜 내어 놓아야 하는 절대적 값이다. 그러나 해답은 문제를 바꾸어 답을 끼워 맞추어도 된다.
그래서 나는 답을 모를 땐, 질문을 달리하여 묻는다. 뻔뻔한 방법일 수도 있고, 자기 합리화의 끝판왕이 될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있나. 살고 봐야 한다는 충동에, 나는 매번 질문을 달리하여 해답이나마 건지려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건져낸 그것을 '의미'라 칭한다.
일말의 의미라도 건져내면, 삶은 그나마 한결 나아진다.
공허함은 충동적인 스토리로부터다.
'충동'은 가만히 있질 못하는 마음의 운동 에너지다.
고로, 공허함을 느꼈다면 나는 오늘도 어느 하늘에 역동적으로 삿대질을 한 것이다.
속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더라도, 허공에 손가락이라도 휘둘렀으니 비로소 그 공허함은 수그러든다.
이 충동적인 스토리는 언제까지일지.
끝이 있다는 게 믿기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