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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pr 20. 2021

감정이라는 풍경

'풍경'과 '근경'을 오가는 지혜, '마음의 등산'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


높은 곳에 올라 도심을 바라본 적이 있다.

전쟁터와 같은 그곳이 평화로워 보였다. 나를 가두고 있는 회색빛 빌딩과 사무실은 잘 정렬된 성냥갑처럼 보였고, 분노를 유발하는 교통 체증은 작고 귀여운 장난감 자동차들의 행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 미워하는 사람들. 이 세상에 사람이라는 존재가 있는 걸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허탈하면서도 여유로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그리 아등바등 살아왔을까? 나는 왜 그 사람을 좋아하고, 또 그 사람을 미워했을까? 좀 더 여유롭게 살 순 없었던 걸까? 그때 그 사람에게 왜 그랬을까? 좀 더 배려 있는 마음을 가졌어도 되는 거 아닌가? 그저 한 번 웃고 넘길 일을, 나는 왜 그리 일을 크게 키웠을까? 인생 뭐 있다고 정말.

큰 마음으로, 다시 한번 더 포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자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새로운 삶을 살자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하산(?)을 한 후, 다시금 전쟁터의 병사가 되는 데에는 채 얼마가 걸리지 않았다.

나는 다시 사랑하고, 분노하고, 기뻐하고 그리고 좌절하며 삶의 풍파에 녹아들었다. 다시금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휘말린 삶은 고요할 수 없다. 이리저리 흔들리고 부딪치며, 하루만이라도 버텨보자고 그리고 살아내보자고 외치며 잠자리에 드는 날이 반복되었다.


가까이서 보는 근경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란 말이 있듯이.

풍경엔 여유가 있고, 근경엔 소란이 있다. 우리는 대개 남의 삶은 쉽게 평가하고, 또 쉽게 부러워한다. 다른 사람의 인생은 잘 굴러가고 잘 풀리는 것 같다. 내 인생만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자신을 엄습한다.


이처럼 남의 삶이 흥미롭고 여유 있어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삶은 내게 있어 '풍경'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에게 있어 내 삶은 '근경'이다. 멀리서 보면 보이지 않을 것들이 세세하게 그리고 덕지덕지 보인다. 지금 당장 내 주변의 사물들을 보자. 보이지 않던 먼지가 보이고, 의식하지 못했던 흠집이 발견된다. 자세히 보아야 아름답다는 말도 있지만, 자세히 봤을 때 실망하게 되는 것들도 꽤 많다.


그러나, '근경'이 없으면 '풍경'도 없다.

반대로, 내 삶도 누군가에겐 '풍경'이다. '근경'이 더 좋은 것인지, '풍경'이 더 좋은 것인지를 논하자는 게 아니다. 그 둘 모두 중요하다. 그 둘을 의식하고 살고 있는지, 그 둘로부터 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채는 것이 우선이다.


내게 가장 가까운,
감정이라는 근경


'풍경'이 여유로운 이유는 내가 개입되지 않아서다.

높은 곳에서 바라볼 때 삶은 평안하다. 교통체증도 없고, 직장에서 일어나는 사람들과의 갈등도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이다. 그러니 보다 객관적으로, 여유를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시야가 생긴다.


그렇다면 '근경'이 소란한 이유는 아주 당연하다.

바로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내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 보면,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위가 아닌 내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그 소란과 요동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내 안에서의 커다란 소란과 요동.

바로, '감정'이다.


그러니까, 내 삶 내 근경의 최고봉은 바로 '감정'이다.

삶이 소란한 이유, 인생이 들뜨거나 무겁게 가라앉는 이유. 그 모든 건 '감정'에 좌우된다. 오늘 하루가 보람찼다면, 또 오늘 하루가 고되었다면. 그 기준은 바로 '감정'의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몸이 힘들어도 마음이 충만하다면 의미 있는 하루가 되고, 몸이 편해도 마음이 시궁창이라면 그 하루는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풍경'과 '근경'을 오가는 지혜,
'마음의 등산'


우리는 이처럼 '감정'에 휘둘리며 살고 있고, 우리 삶에 있어 그 휘둘림은 가장 큰 소란과 요동이다.

'나'라는 우주는 '감정'에 따라 수축과 팽창을 반복한다. 내 우주가 수축할 때 내 존재는 쪼그라들고, 내 우주가 팽창할 때 삶은 자신만만하다. 감정이란 건 내 온 몸안에 울려 퍼지는 무엇이다.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미치는 그 영향은 끝이 없으므로, 감정의 흐름과 그 연속이 곧 우리 삶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사뮤엘 죤슨은 '외적인 영향에 좌우되고 싶지 않다면 먼저 자기 자신의 격렬한 감정부터 초월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건 '초월'이란 단어다. '초월'은 '경험이나 인식의 범위를 벗어나 그 바깥 또는 그 위에 위치하는 일'을 말한다. '범위를 벗어난다'는 의미가 '나는 그것과 상관없다'라고 해석되어선 안된다. 즉, '초월한다'라는 뜻은 '내 경험과 인식을 가지고 다른 각도에서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뜻'이 되어야 한다.


높은 곳에 올라 '풍경'을 바라보는 일.

그러나 '근경'에서 경험한 것들을 잊지 않는 일.


그러니까 우리가 감정이 격렬해질 때.

너무 기뻐서 주체가 안되거나, 너무 슬퍼서 나락으로 떨어질 때. 말 그대로 감정에 휘둘릴 때.


우리는 마음의 등산을 해야 한다.

높은 곳에 올라 '근경'을 벗어나야 한다. '풍경'을 보려 노력해야 한다. '감정'이 '풍경'이 될 때, 우리는 '감정'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자극'과 '반응'사이에 서 있을 수 있다. 자극에 자동적으로 바로 반응하게 되면, 우리 삶이 얼마나 팔랑이는 지를 이미 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감정'에 요동하기보단, '감정'의 의미를 알아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초월'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마음을 먹는다'란 표현을 한다.

'마음을 먹는다'란 표현은 '다짐'을 뜻한다. '다짐'은 일종의 '감정'이다. '먹는다'란 표현은 감정이 어디 가지 못하게 내 안으로 '내재화'하겠다는 강력한 시도다.


결국, '내재화'하겠다란 말은 그것을 잘 다스리고 활용하겠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감정'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는 건 착각이다. '감정'이 '근경'이 되는 순간, 감정은 다스릴 수 없다. 이성으로도 제어가 안된다.


다만, 우리는 '감정'을 '근경'과 '풍경'으로 오가며 오롯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또 때로는 그것의 의미를 여유롭게 바라볼 수는 있다.


그러할 때 우리는 '감정'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감정'과 함께 조금은 더 많은 걸 해낼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이루어 온 것들, 또는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잘 될 것이다.


그 안에 있던 '감정'의 '근경'과 '풍경'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오늘도 내 마음을 가깝고도 멀게 바라보며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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