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에 마음껏 눈물 흘려볼 수 있을까
나는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슬픔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다. 슬픔과 고뇌, 좌절과 분함을 느껴 울컥하곤 하지만 눈물이 핑 도는 데에 그친다. 아무래도 눈의 크기가 크지 않고, 옴팍한 눈매로 인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반면, 아내는 작은 감정의 요동에도 눈물을 또르르 흘린다.
물론 눈의 크기도 나보단 훨씬 크다. 함께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슬프거나 감동적인 장면이 나와 아내의 얼굴을 보면 여지없이 눈물이 온 얼굴을 적시고 있다. 때론, 하품 한 번만으로도 눈물 한 줄기를 만들어내는 재주(?)를 발휘하기도 한다.
사실, 나도 가끔은 눈물을 와르르 흘려보고 싶다.
목 놓아 울어보고도 싶다. 그러나 그게 마음처럼 잘 되지 않는다. 그럴만한 상황도 별로 없거니와, 어쩌면 이미 그 상황을 맞이했으나 내 사회적 페르소나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TV를 보다가 문득, 옛 초콜릿 광고에 나왔던 CM Song을 들었는데 그 의미가 젊었을 때의 그것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난 사랑해요.
이 세상 슬픔까지도.
젊음은 좋은 것.
하늘을 보면서 살아요.
고백하자면, 난 젊다고 여겨지던 그 나이 때.
슬픔을 사랑할 수 없었다. 삶의 모든 부조리함과 내게 주어진 것보단 그렇지 않은 게 더 많다는 걸 점차 알게 되는 때가 바로 '젊음'이었기 때문이다.
중년이라는 지금은 젊을 때보다는 가진 게 더 많다.
그러나, 잃은 건 더 많다. 이것이 바로 삶의 부조리함이다. 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는 내 인생은 시작부터가 불공평하고, 얻으려 하면 할수록 잃는 게 더 많은 그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만약, 내가 정말 영혼까지 탈탈 털어 울며 눈물을 흘리는 날이 있다면 바로 이 삶의 부조리함 때문일 거라는 걸 나는 잘 안다.
그러나 지금은 부조리함의 끝이 무엇 일지를 기다리는 오기로 그 눈물을 참고 있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넘어선 존재는 오히려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아픔을 느낄 겨를조차 없다.
젊을 때의 슬픔과 눈물은 패배와 결핍을 이야기하지만, 중년에게 있어 슬픔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임을 잘 안다.
베르테르가 슬픔을 받아들이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건, 그의 '젊음'때문이다. 그의 나이가 중년을 넘어섰다면 아마 스스로에게 총을 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누적된 슬픔은 오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오기와 독기가 가득한 눈을 가진 사람은 총구를 스스로에게 겨누지 않는다.
그럼에도 요즘은 여성 호르몬이 좀 더 많아졌는지 뭔가 마음이 울컥할 때가 많다.
코끝이 시리고 작고 옴팍한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지만, 결국 흐르지 않는다.
만약 찔끔이라도 눈물이 흘러넘쳤다면 나는 그것을 눈물이 아니라 '땀'으로 규정할 것이다.
가장이라는 삶의 무게를 견디며 마주한 땀. 슬프거나 서러워 나오는 '눈의 물'이 아니라, 초라하지만 고군분투했다는 증거. 열심히 그리고 잘 살아내었다는 몸의 반응으로 말이다.
나는 기쁨과 함께 슬픔을 수용한다.
웃음과 눈물을 아우르는 '땀'을 나는 포용하기로 한다.
내가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포용할 때.
비로소 삶은 나에게 그 어떤 '이유'와 '의미'를 내던지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