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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23. 2021

불안은 지극히 논리적인 감정이다.

이제 나는 불안이 던지는 질문에 꽤 익숙하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는 이유


우리는 보통 음표 그 자체가 소리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조금 다르게 이야기했습니다.

"소리는 음표와 음표 사이에 있다."

- 최진석 교수의 장자 철학 강의 중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라는 영화는 1974년에 개봉한 독일 영화다.

청소부로 일하는 독일 중년 여성 에미와 이민 노동자인 아랍 청년 알리의 이야기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동거까지 하지만, 인종과 나이 차이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 시달리다 끝내 슬픈 결말을 맞이한다. 편견으로 점철된 세상의 따가운 시선은 불안이 되었고 그 불안은 끝내 현실이 된 것이다.


불안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공포'다.

바꿔 말하면 '만연화된 공포'다. 다이어트를 결심한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아는 맛'인 것처럼, 일어나진 않았지만 어쩐지 친근한 '만연화된 공포'는 우리 삶을 기어이 흔들어 놓고 만다.


그러나 불안이 그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내게 언제든 일어날 수 있으며, 불안은 결국 그 알 수 없는 일들이 내게 닥쳤을 때 심적으로 대비할 수 있는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불안 앞에 어떤 결정을 내리고 있을까?

지나온 삶을 톺아보니, 크게 두 가지 모습의 내가 보였다. 하나는 불안 앞에 주저앉는 것. 다른 하나는 불안을 힘으로 다음으로 나아가는 것. 


불안 앞에 주저앉는 건, 에미와 알리의 모습과도 같았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란 한숨과 함께 삶을 한탄하는 모습. 끝내 현실이 된 불안 앞에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던 내 모습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내게 다시 또 다른 '불안'이 되어 나를 위축하고 또 위축시켰다.


이와 달리, 불안의 힘을 빌어 오히려 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최진석 교수의 장자 철학 강의를 듣던 중. '소리는 음표와 음표 사이에 있다'란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쳤다. 다른 음, 즉 안정하지 않은 음표의 이동이 소리와 음악을 만든다는 사실이 놀랍게 다가왔다. 그저 들리던 소리와 음악은 결국 불안에서 불안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던 것이다. 

과연 그랬다. 음표 하나에 머물러 있으면 음악은 나오지 않는다. 기어이 불안함을 딛고 앞으로, 다음으로, 높이가 다른 음으로 나아갈 때. 그러니까, 불안한 오늘이라도 주저앉지 말고 오기로라도 더 나은 내일을 다짐할 때 내 삶은 좀 더 나아질 수 있었다.


불안에 영혼을 잠식당할 것인가.

불안을 딛고 다음 음으로 넘어가 멜로디를 만들어 낼 것인가.


불안 앞에 주저앉지 않으니, 비로소 내게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불합리한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논리적인 감정, 불안!


나는 지극히 불합리한 존재다.

내일이 시험인데도 오늘을 퍼지른다. 출근하여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으나,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던 취업 때의 초심을 잃고는 월요병에 시무룩해한다. 운동해야지, 책을 읽어야지, 글을 써야지, 뭐라도 해야지란 생각만 하고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의지와 실천의 괴리를 볼 때, 나는 불합리함의 극치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를 미동이라도 하게 만드는 건 역시 '불안'이다. 


시험에 떨어지면 어쩌지? 

월급이 끊기면 어쩌지? 

살이 너무 쪄서 건강이 나빠지거나, 사진 찍을 때 이상하게 나오면 어쩌지? 

책을 읽지 않거나 글쓰기를 멈춰 머리와 마음이 텅 비어버리면 어쩌지? 


이처럼, '작심삼일'이든 '작심일일'이든 불합리한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건 바로 '불안'이며, 그러하므로 '불안'은 나보다 훨씬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감정이라 할 수 있다.


에너지는 불안정함에서 온다!


지하수를 퍼내기 위해 손잡이를 위아래로 움직여야 하는 펌프질.

물레방아를 돌리는 물의 낙차. 풍력 발전기를 돌리는 고기압과 저기압의 결과물인 바람. 뜨거움과 차가움이 만들어 내는 증기기관. 그리고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음표와 음표로의 이동까지.


'에너지'는 결국 불안정함에서 온다.

지금까지 우리 삶을 움직이게 하고 지탱하여준 것이 바로 '불안'이라는 사실. 불안으로 격렬하게 흔들리는 존재는 살아 있다는 증거다. 숨 쉬지 않는 존재만큼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건 없다.


비로소 나는, 불안 '때문에'가 아니라 불안 '덕분에'를 떠올리게 된다.


고인 물은 썩는다.

움직이지 않으면 굳는다.

머물러 있으면 잠식된다.


'불안'은 나에게 자꾸 움직이라 말한다.

꾸역 꾸역이라도 움직이는 과정에서 삶의 에너지는 솟아나게 된다.


What is next?
그래서 다음은 뭔데?


이런 차원에서 '불안'이 던지는 질문은 꽤 묵직하고 의미가 있다.

불안은 자꾸만 내게 '다음'을 묻는다. 삶엔 끝이 없음을 불안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고 3땐 대학만 가면 끝일 줄 알았고, 대학생 땐 취업만 하면 끝일 줄 알았다. 돈을 벌고 있는 직장인은 오늘도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제2의 삶에 대한 걱정과, 자녀 교육 그리고 자아실현이라는 가볍지 않은 난제들로 하루하루가 버겁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불안 때문이다.

그래서다. 불안을 제법 에너지로 삼을 줄 알게 되었다. 등떠밀리던 삶은 어느 정도 불안정함에서 오는 삶의 에너지를 파도 타듯 즐길 수 있게 된다. 끝이란 없음을 불안이 알려 주니, 끝장을 보고 맘 편하자는 환상은 버린지 오래다.


대신, 답을 찾기보단 문제를 발견하는데 더 주력한다.

질문하는 것이다. 불안이 내게 던지는 'What is next?'란 목소리가 생생하다. 고여있지 말라고, 굳어있지 말라고, 머물러 있지 말라고 말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무탈하라'는 말은 오히려 더 무섭다.

류성룡이 집필한 '징비록'엔 '조선은 200년간 지속된 평화 때문에 온 나라 백성이 편안함에 익숙해져 있었고, 전쟁이 날 것이라는 위기감이 없었기에 왜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잦은 고통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고, 위기를 고통스럽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징비록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불안하지 말아야지', '불안을 느끼는 내가 문제인가'란 생각을 많이 해왔다.

생각해보니 이는 '무탈하자'란 말과 닮아 있었다.


내가 얼마나 무서운 생각을 해왔는지, 그리고 이러한 생각으로 얼마나 많이 나를 괴롭혀 왔는지.

해내고 싶었던 것을 오히려 해내지 못했던 그때를 돌아보니, 불안을 제거하려는 속내가 가득했음을 깨닫는다.




불안을 막연하게 볼 때 우리는 그 공포에 압도당한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은, 솥뚜껑을 보고도 놀라게 만든다. 막연하게 보면 그것은 자라이고, 자세히 보면 그것은 솥뚜껑이기 때문이다.


불안이 왔을 때 즉, 안정적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실체를 돌아봐야 한다. 그 실체 안에는 '에너지'가 숨어 있으며, '다음은 뭔데?'란 질문이 가득하다.


이제 나는 불안이 던지는 질문에 꽤 익숙하다.

답보다는 오히려 질문에 더 마음의 귀를 쫑긋 세운다.


예전보다 내가 더 많은 걸 이루고 있는 이유.

무언가를 이루어 허탈해하기보단, 다음을 생각하고 움직이는 이유.


나보다 더 지극히 논리적인 불안이라는 감정을 받아들인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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