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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해내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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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25. 2021

해내기 위해 '목적'과 '목표'를 구분하는 삶

인간은 재주가 없어서가 아니라 목적이 없어서 실패한다.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지다!


인터뷰를 하는 학생은 상당히 똑똑해 보였다.

마이크를 대고 질문하는 기자의 물음에 또박또박 대답하는 모습. 영재 고등학교라는 후광에 힘입어서인지 그 학생의 일거수일투족에 눈길이 갔다. 열심히 노력하여 수석으로 입학하고, 법대나 의대는 이미 따놓은 당상으로 보이는 그 학생에게선 일종의 여유까지 느껴졌다. 물론, 그 여유 뒤에는 일반 직장인의 월급을 훌쩍 뛰어넘는 학원비가 있었다.


그러다, "하고 싶은 게 뭐예요? 꿈이나 되고 싶은 것은요?"라는 기자의 질문을 받아 든 학생의 얼굴엔, 생기 있게 돌던 여유의 기운이 게눈 감추듯 사라지고 없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학생은 대답했다.

"사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뭘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전쟁에선 패배했다. 전투에서 이긴다고 전쟁도 이기리란 법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눈 앞의 작인 이익을 추구하다가 끝내 그보다 더 큰 걸 얻지 못하는 경우와 상통한다.


이러한 예는 전쟁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비일비재하다.

토익 시험에서 점수를 잘 받는 건 전투에서 이긴 것과 같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달 외운 단어와 빈칸에 들어가는 정답의 법칙, 그러니까 언어가 아니라 스킬을 배우고는 원어민 앞에서 한 마디도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즉, 전쟁에선 패배하는 것이다.


성분 함량을 속여 당장의 이익을 확보한 기업은 전투에선 이겼을지 몰라도, 끝내 그 비위가 밝혀지거나 품질이 저하되어 고객의 외면을 받게 된다면 그 기업은 전쟁에서 패배하게 될 것이다.


열심히 공부했고, 우수한 성적을 얻은 영재 고등학교의 학생은 전투에서 이기는 중이다.

그러나 정작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그 학생의 말에서, 전쟁의 결과는 쉬이 예견이 되는 듯하다.


'본질'과 '수단'이 전도된 우리네 삶


전투에서는 이길지 모르나, 전쟁에서 패배하는 일은 왜 일어나는 걸까?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목적'과 '목표'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전쟁'이 '목적'이라면, '전투'는 '목표'다.

'목적'이 '본질'이라면, '목표'는 '수단'이다.

'본질'이 '왜'라면, '수단'은 '어떻게'다.


마라톤에서 1등 하고자 하는 사람이 금메달리스트에게 특별 훈련을 받았다.

충격을 고르게 분산시켜주는 신발을 고르는 것부터, 땅에 발을 밀착하여 효율적으로 밀어내는 방법. 적절한 속도를 위한 양 팔 최적의 각도와 시선의 위치까지. 사소한 것부터 전문적인 것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습득하여 마침내 그는 가장 빠르게 42.195km를 달릴 수 있는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대회에서 1등은커녕 꼴등도 모자라 완주의 기록조차 하지 못한 채 대회를 마무리했다. 그는 방향을 잃고 결승선의 반대로 달렸기 때문이다.


'목적'과 '목표'를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네 삶은, '본질'과 '수단'의 전도로부터 온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위 마라톤의 예다.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어내려 할 때 '왜'보다는 '어떻게'에 집중한다. '빨리빨리'라는 집단 무의식 특성상, 우리는 '왜'를 곱씹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바로, 당장. '어떻게'를 알아내어 좋은 결과를 내려한다. 그 결과는, 빠르게 뛰는 방법은 습득했으나 방향도 모른 채 내달린 꼴이 된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보다는, '어떻게'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을까.

'왜'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지보다는, '어떻게' 점수를 잘 받을까.

'왜' 어디로 달려야 하는지보다는, '어떻게' 빨리 달릴까.


'본질(왜)'과 '수단(어떻게)'이 전도된 삶은 이토록 고달프다.


해내기 위해 '목적'과 '목표'를 구분하는 삶


무언가를 이루어 내기 위해선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그림자를 앞서가려는 우둔함으로, 속도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어떻게'에 집중하다 그것에 매몰되는 이유다. '어떻게'에 매몰되면 본질과 방향을 잃는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아주 당연한 진실을 잊게 된다.


우리는 무언가를 하자고 마음먹었을 때, 결연한 다짐을 할 때 '왜'를 쉽사리 생략한다.

지금 당장 내가 해내려고 다짐한 것들을 떠올려 보자. 또는, 거창하게 계획을 세웠다가 멈춰버린 것들을 떠올려봐도 좋다.


그것들에, '왜'라는 물음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작심삼일이나 용두사미로 끝났던 일들을 돌아보면, 여지없이 그것들에겐 '왜'가 없었다. 그저 빨리 해내고 치워버리려는 조급함만이 있었다. '목표'만 높게 설정하고 잘게 썰어 나를 괴롭혔지, 정작 이것을 왜 하는지에 대한 '목적'은 없었다.


'목표'는 나를 괴롭히기에 아주 좋은 수단이다.

높게 잡으면 된다. 하루하루 그것이 밀려, 나를 다그치면 된다. 자존감은 떨어지고, '난 뭘 해도 안돼'란 어둠의 길로 들어서는 'Auto-pilot'이 작동된다. 더 무서운 건, 이것은 반복된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반복은 정서를 흐트러뜨리고, 어둡고 습한 감정을 마음에 각인한다.


그럴 땐, 차라리 '목표'를 과감하게 떨쳐버려도 좋다.

대신, 분명한 '목적'을 떠올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글쓰기를 꾸준히 하고 싶었는데 꾸준하지 못한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목표'를 두지 말자고 스스로와 타협했다. 목표를 두었다면 하루에 글 하나, 일 년 안에 책 출간하기 등을 정했을 것이고 그것들을 이루지 못해 글쓰기는 멈췄을 것이다. 그래서, 쓰고 싶을 때 글을 쓰자고 마음먹었다.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았다. 일 년 뒤에 무언가가 쌓여 있을 것이고, 그것이 쓰레기면 버리고 자산이면 가져가면 되겠지 생각했다. 대신, 더 이상 소비적인 삶을 살기 싫어 글쓰기를 시작했으니 '선하고 강한 영향력을 나누는 생산자의 삶'을 살아가자는 '목적'은 분명히 했다. 말 그대로 '목적'은 분명하되, '목표'는 없는 글쓰기를 실천한 것이다.

'목적'이 분명하니 결실이 뒤따랐다. 꾸역꾸역 그러나 나를 다그치지 않은 글들이 모이고 모여 여러 권의 책이 되었으니 말이다.




전투에서 이기는 것은 중요하다.

전쟁이라는 큰 그림 안에, 그 방향과 목적이 부합될 때 그렇다.


때로는, 전투에서 지더라도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전략이 될 수도 있다.

지금 당장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이라면 그 결과는 놀라울 것이다.


'왜'를 먼저 생각하다 보면, '어떻게'란 수단을 조금 늦게 알 수도 있다.

그러나, 방향을 잃은 '어떻게'는 소용이 없다. 오히려, '왜'를 확실히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가 더해지면 그 일은 더 일취월장해진다.


무언가를 해낸다는 건 '목적'과 '목표'를 잘 구분해내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둘을 전도하지 않으니, 확실히 이전보다 이루어내는 게 더 많다. 


'왜'를 생각하면 이루어내고 해낼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진다는 이야기다.


인간은 재주가 없어서가 아니라
목적이 없어서 실패한다.

- 빌리 선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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