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등을 보며, 나는 오늘도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철없던 시절을 돌아보며 깨닫는 건, 지금도 나는 철이 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예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철이 들었다고 할 수 없고, 지금의 나보다 예전의 내가 나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나는 자라서 내가 되었고 내가 직접 밥벌이를 하고 있으며 어느샌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론 소스라치게 놀란다.
철이 안 든 존재가 가정을 꾸리고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다니.
이 무슨 기가 찬 일인지를 모르겠다.
어찌어찌하여 아이들은 자랐고, 어느덧 제 라면 정도는 스스로 끓여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때론 방 앞에 '출입금지'란 푯말도 붙여 놓는다. 자아가 형성되고 있고, 이제는 제 할 말은 할 나이란 이야기다.
아이들이 그마만큼 자라는 동안 나는 얼마나 자랐을까?
어느 한 날, 가방을 메고 등교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았다.
작은 등판에 들린 가방이 유난히 커 보였다. 맘 같아선 손으로 받쳐 그 무게를 덜어주고 싶었다. 살아가다 보면 등과 어깨에 짊어질 짐의 무게가 더 늘어날 것을 알기에. 그러나, 아이들의 짐을 내가 대신해주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삶의 짐 안엔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무언가가 가득 들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직접 확인해봐야 할 아이들의 몫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보며 웃음이 났다.
어쩐지, 오히려 내가 한 뼘 더 자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다. 이기적이다 못해 철이 없고, 철이 없어 이기적인 내가 다른 누군가를 먼저 생각하다니.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고 누군가의 짐을 대신 짊어 지려했다는 건, 나는 누군가를 지극히 사랑하고 있고 그러함과 동시에 성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등을 보며 자란다고들 한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나는 아이들의 등을 보며 자란다.
아이들의 등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함이 있다.
저 어린아이가 세상에 나가 어찌 잘 살까란 염려와 연민 그리고 마음의 응원이 한데 어우러진 복합적인 감정. 제 나이에 걸맞은 무게를 지고 터벅터벅 걸어 나가는 그 모습에 나는 마음이 울컥하기도 하고 결연하기도 하다.
나는 아이들에게 멋지게 치장한 등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저 각자의 삶의 무게를 온전히 잘 감당해내고, 그것으로부터 의미를 찾아내어 묵묵히 하루를 살아내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등에 담는다.
어쩌면 이러한 다짐은 아이들의 등을 보며 배우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철 없이 모든 걸 팽개치거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리고 멋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이제는 알았으니.
소중한 걸 지켜야지.
더 많이 사랑해야지.
아이들의 등을 보며, 나는 오늘도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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