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부룩함을 즐길 줄 아는 나이
챙겨 먹지 않으면 매가리가 없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챙기면 속이 더부룩한 나이가 되었다.
그 웃지 못할 어정쩡함은 중년을 닮았다. 젊음도 늙음도 아닌 애매함의 경계에서 중년은 그렇게 매가리가 없거나 더부룩함을 오간다.
다시 보니, 어정쩡함이 중년을 닮은 게 아니라 중년 그 자체가 어정쩡함임을 나는 다시 깨닫는다.
그런데, 난 이 어정쩡함이 더 이상 싫지 않다.
살다 보면 매가리가 없어야 할 때도 있고, 더부룩함을 느끼며 멈출 줄 알아야 하는 순간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젊을 때는 채우기에 급급했다. 무어라도 꽉꽉 채우려 했고, 모든 걸 쟁취하려 열정을 불태웠다. 과유불급이란 말은 젊음에겐 통하지 않았다. 가지면 가질수록, 많으면 많을수록 젊음은 더 채워졌고 그것들을 모두 소화하고 감당해낼 수 있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세상을 향한 증오가 되었고, 그 증오는 나에게 오기가 되었으며, 그 오기는 또다시 나에게 성장이라는 선물을 안겨주었다. 아마도 난 그렇게 어른이 되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어른이 된다는 건, 그리 달갑지 않은 삶의 변화다.
더부룩함과 마주쳐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씹어 먹어도 소화를 할 것만 같았던 기고만장함은 자장면 한 그릇으로도 다음날 아침까지 속이 꽉 찬 불쾌함으로 변질되었다. 초라함이 몰려왔다. 내가 이리도 작고 힘없는 존재였을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더부룩함은 나에게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신호와 격려였다. 내 분수를 알고, 몸을 돌봐야 하며, 꽉꽉 채우는 건 이제 하지 않아도 된다는 지혜의 목소리와 다름없었다.
정말 그렇다.
내 주위엔 더부룩함이 만연해 있었다. 먹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관계, 과도하게 높이 잡은 목표, 내 것이 아닌 것에도 눈독을 들이는 욕심까지. 스스로를 더부룩하게 만들고 있는 건 나였고, 더부룩함으로 인해 나는 허덕이고 있던 것이다.
더부룩함을 해소하려면 부족해야 한다.
무언가를 비워내야 한다. 인간 관계도 꽉 채우려 하지 말고, 완벽을 추구하는 목표는 좀 낮추고, 내 것이 아닌 것에는 마음을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하다.
사람은 배고프지도 않고 배부르지도 않은 딱 그때 행복감이 최고조에 이른다.
어찌 보면 애매함의 그 순간이 바로 행복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매함의 상징인 중년이 행복이라 말한다면 그것은 비약인 걸까?
지금 이 순간이 행복의 최고조라 말할 수 없지만, 후일 나이를 많이 먹어 배부를 때. 젊지도 않고 늙지도 않은 그때가 가장 좋았다고 나는 지금을 돌아보고 있지 않을까.
이제는 좀 부족한 게 좋다.
더부룩함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중년이라는 지금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