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우리네는 집단주의 문화 속에서 살아왔는데, 그에 대한 반발심리여서일까. 개인주의가 확대되는 이 시대에 누군가의 말에 휘둘린다는 용납될 수 없는 무엇이 된 것이다. 특히나 자신만의 개성을 내세우고 그것에 자부심을 갖는 새로운 세대에게는 더더욱 경기를 일으킬 일이다.
그러나 너무 단단하면 부러지고, 봉우리가 높으면 골도 깊다.
개성이 강한 이 시대에도, 열렬히 멘토를 찾아 하나하나를 세세히 묻는 정서가 공존한다. 즉, 언제나 우리 삶엔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그 양면성을 인정할 때 삶은 비로소 편안해진다. 어느 한쪽이 맞다고 우기기보단, 어느 한쪽의 길로만 가야 한다고 떼를 쓰기보단 다른 한쪽을 돌아보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다시,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린다는 걸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말에 대한 부정적 반응은 '휘둘리다'란 말에서 오는 것이 분명하다. 휘둘린다는 건 부림을 당하거나, 지배를 당하거나 또는 마구 다루어지는 걸 말한다. 그렇다면 우선 부정적인 감정을 벗겨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우리는 본질을 볼 수 있다. 결국, 휘둘린다는 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 정도가 세기 때문에 격한 단어가 된 것이지, 그 원뜻을 파고들어 내가 얻어낼 것이 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남의 말에 영향을 받는 게 과연 좋지 않은 일일까?
이미 답을 서두에서 말했다. 양면성을 떠올리면 된다. 간섭받기 싫지만, 멘토링은 받고 싶은 마음. 누구의 잔소리는 듣고 싶지 않지만, 누군가의 칭찬은 듣고 싶은 정서. 누군가가 말하는 방향을 거부하고 싶지만, 결국 그 길을 걷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까지.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남의 말에 휘둘리며 살고 있고, 또 누군가를 휘두르려 하고 있다.
즉, 사람과 사회 그리고 시스템에서 오가는 영향을 우리는 거부할 수 없다.
누군가의 칭찬이나 위로로 내가 힘을 낸다면 그것은 남의 말에 영향을 받게 된 것이고, 그 정도가 세다면 '남의 말에 휘둘린다'라는 범주에 흔쾌히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남에 말에 휘둘린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경기를 일으키기보단, 때론 그것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부정적으로만 보던 것을 뒤집어보면, 보이지 않던 게 보인다.
새롭게 부임한 국가에서 내 자아는 쪼그라들고 있었다.
일도 익숙지 않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나 자신을 쪼아대는 것이다. 단기간에 어떤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조급함, 시간이 해결해 줘야 할 것까지 넘보려는 성급함, 슈퍼히어로와 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데에서 오는 자괴감까지. 내가 받아들이고 감당해야 할 짐은 너무나도 무겁다.
그러한 가운데, 다른 곳에 있는 상사와 전화를 할 일이 있었는데 그 상사는 '너 욕심 되게 많은 놈이잖아. 잘해라.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이라고 말했다.
다소를 넘어 굉장히 투박하고 거친 말투였지만, 나는 그 말에 무척이나 휘둘리고 싶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그러한 거친 생각과 불안하지 않은 용기. 힘을 내어 까짓것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이렇게, 때론 남이 던진 말에 휘둘릴 때도 있어야 한다.
휘둘려 나락으로 빠지는 게 아니라, 휘둘려 내가 잊고 있던 내 안의 잠재력을 꺼내야 한다.
이 또한 삶의 중심 잡기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또는 사방으로 휘둘릴 때. 그 중심엔 나 자신이 있어야 한다. 한쪽으로 쏠리려는 힘은 다른 쪽의 힘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리하여 그 두 힘을 중심을 잡는데 쓴다면, 흔들린 것만큼이나 중심을 잘 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남의 말을 듣는 건 나다.
휘둘리고 흔들리는 것 또한 나다.
그 흔들림과 휘둘림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나이며, 내가 나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나는 그 상사의 말에 휘둘려 힘을 내보기로 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끝까지 파고들어보기로, 통하지 않는 말을 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노력해보기로. 그 상사가 나에게 던진 말의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