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회의로 꽉 차 있었고, 퇴근 시간에 이르러서야 쌓인 메일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주어졌다. 익숙한 야근. 시차가 다른 한국과의 연락. 풀리지 않는 문제들과 그럼에도 새로운 걸 계획해야 하는 업무의 중첩. 잠시 고개를 들어 뻐근함을 달래고 오늘은 이만 집에 들어가 보자며 사무실을 나섰다.
폭우로 도로엔 물이 많이 고여있었지만 늦은 시간이므로 차는 막히지 않았다.
스페인어 회화를 틀어 놓고 나는 그것을 듣고 따라 말하며 퇴근길을 만끽했다.
집에 오면 적막함이 나를 반갑게 맞이 한다.
몇 달 뒤에 도착할 가족들. 이젠 적막함도 익숙하다. 나를 반갑게 맞이하여 주는데, 내가 굳이 그것을 밀어낼 필요 없다는 생각에 혼자 피식 웃었다.
집에 들어온 뒤, 한국 본사와 미처 하지 못한 통화를 하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무언가 살짝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것은 이전엔 느껴보지 못한 낯선 무언가였다.
"자.. 잠시만요. 이따 다시 전화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드니 천장에 매달린 인테리어 조명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술을 먹거나 또는 두통이나 어지러움으로 세상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 차올랐다. 그것이 가상현실이라면, 이것은 실제 상황.
온 집안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한쪽 벽면이 모두 통창인 전망 좋은 아파트 21층. 그 모든 장점이 단점으로 변하는 데에는 순간이었다. 비틀어짐으로 유리가 깨져버리진 않을까, 이대로 건물이 무너지진 않을까. 잠시 잠깐의 진동이 아니라, 바다 위 파도에 집을 지은 것처럼 건물은 계속해서 비틀거렸다.
그러니까, 집이 왜 흔들리는 거야?
말로만 듣던 지진이란 걸 알면서도, 그 강도가 심하니 뇌는 정지하는듯했고 어서 빨리 평지로 뛰어 나가야 한다는 상식을 알면서도 발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복도에선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분주한 소리가 들려왔다.
멕시코 시티가 가슴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유
놀란 마음에 멕시코 현지 동료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 친구는 괜찮냐는 안부와 함께 2017년의 기억으로 항상 조심하며 살고 있다는 답을 주었다.
2017년 9월 19일 오후 1시.
멕시코 푸에블라주에서 남쪽으로 55km에서 떨어진 곳을 진원으로 규모 7.1의 강진이 발생했다. 푸에블라 주, 모렐로스 주, 멕시코 시티에 피해가 발생하고 40개 이상의 건물이 붕괴되었다. 최소 248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된 그 지진은 특히 멕시코 시티에 큰 상처를 안겨다 주었다.
멕시코 시티의 피해가 가장 컸던 이유는 약 2100만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인 탓도 있지만, 도시 자체가 고대 텍스코코 호수였던 분지에 세워진 이유도 있다.
14세기경 아즈텍 인들은 호수 서쪽 섬에 '테노치티틀란' 도시를 세우고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그 이후, 아즈텍을 정복한 스페인이 이곳의 물을 빼내고 대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멕시코 시티이고, 이 지형 자체는 부드럽고 습하다. 비유를 하자면 '젤리'와 같다. 한 학술지에서는 '멕시코 시티의 지형은 지진이 발생했을 때, 퍼펙트 스톰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이 퍼펙트 스톰이 제대로 멕시코 시티에 영향을 준 지진은 1985년에 있었다.
놀랍게도, 날짜는 9월 19일. 이른 아침 규모 8.1의 지진은 젤리 지형을 무참히 흔들어 멕시코 시티 일대가 크게 파괴되고 1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아카풀코 남서쪽 규모 7.4의 지진
내가 조우한 이번 지진은 아카풀코 남서쪽에서 발생한 규모 7.4의 강진이었다.
멕시코시티에서 388km 떨어져 있는 곳이지만, 앞서 말한 젤리 지형은 그 진동을 고스란히, 아니 더 크게 받아내었다.
멕시코는 1985년 대지진을 교훈으로 내진 설계가 적용된 건물과 함께 조기경보시스템(SASMEX)을 구축했다.
북미판과 코코스판의 경계인 태평양 해안을 따라 진앙지라 예상되는 곳에 약 100개의 센서가 있다. 지각판의 진동을 감지하고 분석해 지진파가 감지되면 주파수가 국영 라디오 채널로 보내어져 경보가 울린다. 이 경보는 사람들에게 약 92초간의 시간을 벌어준다. 몇 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사람들은 테이블 밑에 숨거나, 건물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다.
생각해보니 진동 이전에 어렴풋이 사이렌 소리를 들은 것 같긴 하다.
그러나 건물이 흔들리고 뒤틀릴 때, 나는 마치 달려오는 차 앞에서 얼어버린 노루처럼 집을 뛰쳐나갈 수 없었다. 복도에서 소리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고, 나간다한들 21층이라는 고층에 있으므로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수 없으니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다는 자기 합리화를 한 것이다.
억겁과도 같은 몇 분이 지나자 집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거실에 있는 긴 줄로 연결된 인테리어 등은 한 동안 좌우로의 흔들림을 멈추지 않았다.
멕시코에 온 지 이제 한 달 반이다.
적응하기 위해 정신없이 고군분투하다 보니 벌써 몇 년을 지난 것 같지만, 한 달 반 어치의 급여가 현실을 말해준다.
멕시코 온 지 한 달 반 만에 지진이라니.
그것도 근래 가장 큰 진동으로 회자되는 규모라니.
공포 이후에 찾아오는 안도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좀 더 과장하면 다시 태어난 느낌의 일부를 얻었다고나 할까.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세상이 좀 많이 달라 보일 것 같다.
P.S
아몬드가 박힌 초코바를 먹고 나서 하나를 더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지진을 겪고 나서는 아무런 고민 없이 두 개를 더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