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Oct 06. 2021

(자기, 타인) 검열관을 내 독자로 만드는 방법

검열관과 대립하지 않는다. 상의한다.

글쓰기를 힘들게 하는
검열관의 종류


내 경험과 수많은 수강생 분들의 질문을 돌이켜 볼 때.

글쓰기의 가장 큰 적은 바로 '검열관'이다.


그 '검열관'은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자기 검열관'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 검열관'이다.


자기 검열관은 그 누구보다 매섭다.

왜 우리는 그토록 우리 자신을 그리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평생을 함께 손 맞잡고 살아가야 할 인연이자 운명인데,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다. 나는 내 평생을 스스로를 괴롭히며 살아왔다. 아주 전문가다. 무엇을 들이대어 그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자존감을 확 끌어내릴 수 있을지를 너무나 잘 안다.

대개는 목표를 높게 잡은 방법을 택한다. 높은 목표를 잡고, (목표를 잡으면서도 못할 거란 걸 알면서도...) 그것을 하나라도 지켜내지 못하면 명치끝으로부터 올라오는 비아냥에 삶은 흔들리고 만다.


또 하나.

기어이 글을 써냈을 때. 귀가 아닌 마음으로부터 들려오는 비웃음은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애개? 이 정도밖에 못 쓴 거야?', '네가 생각해도 이건 너무 평범하지? 재미없지?', '글쓰기를 정말 할 수 있을 것 같아?'라며 생글생글 비웃는 모습이 영락없이 얄밉다.


타인 검열관도 만만찮은 상대다.

사실, 타인 검열관은 두 가지 종류로 또 나뉜다.

첫째, '남이 내 글을 보고 비웃으면 어쩌지'라며 내가 만들어낸 타인.
둘째, 내 글에 기어코 악플을 다는 진짜 타인. (또는 내가 알리고 싶지 않은데 내 글을 읽고 가타부타하는 지인)


타인 검열관을 마주할 때에도, 마음은 한 없이 무겁고 쓰리다.

글쓰기를 괜히 했나 싶기도 하고, 나 혼자 보고 말 것을... 이라며 깊은 후회를 일삼게 된다.


검열관을 내 독자로 만드는 방법


그러나, 이왕 글쓰기를 마음먹었다면.

그 검열관들조차 내 독자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들로부터 오는 압박을 해결하지 않고는 글쓰기는 절대 이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검열관을 내 독자로 만드는 방법은 다행히도 공통된다.


첫째, '페르소나 글쓰기'를 한다.


평범한 것을 평범하게 쓸 때.

자기 검열관과 타인 검열관은 그것을 비웃는다. 아니, 비웃으면 다행인데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다. 관심받지 못하면 글쓰기는 멈춘다.


그렇다면 평범한 것을 평범하지 않게 바라보고, 뻔한 것을 특별하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평범한 것을 특별하게 써내려면, 내 '평범함'을 잘 관찰해야 한다. 나를 관통하여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그 과정이 없다면, 평범한 것은 절대 특별해질 수 없다. 평범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특별함이 나올 수 없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나는 어떤 사회적 가면을 쓰고 있는지. 어떤 '역할'을 하고 있고, 내 '업'은 무엇인지. 내가 가진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내가 하는 일에 가치를 부여하는 '페르소나 글쓰기'는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바꿔준다. '나는 평범한 직장인, 학생, 주부인데...'라고 내 페르소나를 간단하게 정의하면 나는 딱 거기까지만인 존재가 된다.


스스로를 특별하게 가꾸고 발견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평범한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둘째, 목표 없이 꾸준히 쓴다.


검열관이 주는 목표는 내가 달성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건 언제나 그렇다. 그렇다면 글쓰기에 있어서만큼은 검열관과 타협을 한다. 글쓰기만큼 목표 앞에 무너지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전혀 꾸준한 사람이 아니지만 이 타협을 통해 지금까지 글쓰기를 이어올 수 있었다.

하루 하나의 글을 100일 동안 쓰는 강압적인 방법이나, 1년 안에 책을 내야 한다는 협박성 목표를 검열관은 제시했다. 그러나, 나는 하지 못할 것을 알았으므로. 글쓰기만큼은 이어가고 싶었으므로 우선은 목표 없이 시작하자고 응수했던 것이다.


목표가 없으니, 글은 꾸준히 이어졌다.

글쓰기가 괴롭지 않았고 즐거웠다.


꾸준히 써 내니, 검열관도 놀란 눈치다.

자기 검열관도, 타인 검열관들도 다들 놀란다.


결국, 그들을 내 독자로 만들고 나를 스스로 인정하게 만드는 방법은 꾸준한 글쓰기로 그것을 증명해내는 것이다.


목표는 없되, 내가 왜 글을 쓰고 싶은지에 대한 목적은 분명히 하면서.


셋째, 검열관과 대립하지 않는다. 상의한다.


우리는 대개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사람을 '공격자'로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

나를 지켜 내려면, 생존하려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나쁜 게 아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 공격자가 나에게 던진 이야기가 무엇인지, 그 의미와 내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에 몰두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공격자'의 행태에만 집중하여 스스로의 감정만 다치게 할 뿐이다.


예를 들어, 자기가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 글.

누군가 내 글에 남긴 악플. 마음은 아프고 기분은 좋지 않겠지만, 분명 그 안엔 나의 부족함이 무엇인지 담겨 있다. 우리는 그것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기분이 나쁘니, 유쾌하지 않으니 그것을 피하려고만 한다. 피하는 것의 결과는 글쓰기의 멈춤이다.


그러니, 검열관과 대립하지 않고 상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들이 던진 의미와 가치에 집중한다. 기분은 이미 상했으니, 그것에 골몰하지 않는다. 검열관과 오히려 대화한다. 


새로 쓰는 글이든.

퇴고를 하든.


내 부족함을 하나 둘 메꿔 가다 보면, 검열관들은 '공격자'가 아닌 나에게 고마운 '조언자' 그리고 '독자'가 된다.




검열관 과의 조우와 아웅다웅함은 작가가 되는데 필요한 필수 과정이다.

그것 없이 글을 쓰고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단언컨대,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글쓰기는 이미 멈췄을 것이다.


반대로, 검열관과의 관계를 잘 만들어나가면 오히려 그들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된다.

글쓰기를 위해 넘어야 할 산. 그 산을 넘어 우리의 폐활량은 더 좋아지고 상쾌한 공기를 많이 마시고. 내가 보지 못했던 풍경들을 보게 된다.


어차피, 작가의 의도는 독자의 해석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러니,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말과 내가 느끼는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놓으면. 저마다의 해석으로 그 의미를 파악할 것이니, 그것까지 내가 좌지우지해야겠다는 욕심은 버리는 게 좋다.


그것이 진정, 내가 글쓰기를 이어가고 그 어떤 검열관이 오더라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내 독자로 만드는 방법이다.




[종합 정보]

스테르담 저서, 강의, 프로젝트


[소통채널]

스테르담 인스타그램 

매거진의 이전글 글쓰기엔 과거를 바꾸는 능력이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