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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Oct 27. 2021

내 글을 누가 본다는 두려움

이것 또한 '글쓰기의 과정'이다

사람은 참 모순 투성이다.

이랬다가 저랬다가를 수도 없이 반복하다가 심지어는 그 둘을 동시에 머금고 만다. '애증'이란 단어를 예로 들면 좀 이해가 쉽겠다. '사랑과 미움'이란 반대의 개념이 한 단어에 존재하고, 또 이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마음은 디지털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1'과 '0'의 연산이 표현할 수 없는 '양가감정'을 가지는 존재다. 그러니 계산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그 마음은 모순투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천체의 움직임은 예측해도 인간의 광기는 예측할 수 없다'는 뉴턴의 말도 이를 뒷받침한다.


글쓰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찾아온 적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무어라도 쓰기 시작한다. 그런데 재밌는 건, 이걸 누가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저 혼자 보는 글을 쓰자고 했다면 번뇌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일기에 머무르지 않으려 하다 보니 욕심이 생긴다. 글을 발행하고 늘어나는 구독자나 조회수를 보며 전전긍긍한다. 하루빨리 내 글을 봐주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성급한 마음에 주위 사람들에게 내 글을 봐달라고 공유를 하거나, 스스로 자랑을 하기도 할 것이다.


마음의 모순은 이다음에 일어 난다.

정말로 구독자 수가 늘고, 조회수가 올라가고, 지인들이 내 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문득, 겁이 나고 만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내 글을 보고 있다는 생각은 의외로 불편하다. 발가벗은 몸뚱이를 내어 보이는 것보다 더 부끄럽고 불편할 수 있다. 속살도 아닌, 더 깊은 곳의 '마음 살'을 내보이는 게 바로 글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 생각과 마음.

그것들을 내어 놓는 것이 글쓰기이므로, 나는 사람들에게 모든 패를 내어 보이는 것과도 같다. 혹시라도 지인이 내 글에 댓글을 달거나, 피드백을 준다면 더 이상 글쓰기는 자유롭지 않게 된다. 스스로 소재의 한계를 만들고, 글을 쓰는 시점부터 남을 의식하게 된다. 나는 '내어 놓는 글쓰기'를 지향하는데 남을 의식하면 제대로 내어 놓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나는 '글쓰기는 삶쓰기다'라고 믿는데, 눈치를 보다간 내 삶을 제대로 투영하거나 표현해낼 수 없다.


누군가 내 글을 봐주었으면 좋겠다란 생각과 바람은, 누군가 내 글을 본다는 생각이 들면서 두려움으로 급변한다.

누구를 탓할 순 없다. 그것은 모두 내 모순된 양가감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글쓰기를 멈춰야 할까? 아니다. 이것 또한 '글쓰기의 과정'이다. '작가'는 결국 이러한 과정과 결과를 모두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다. 그게 무서우면 글쓰기를 멈추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그저 쓰면 된다. 자기 검열관이 뭐라고 하든,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내 할 말을 하고, 내 삶을 쓰고, 내가 말하고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하나 쌓아가면 된다.


내 글을 누가 본다는 두려움은 글을 쓰는 모든 이에게 분명 찾아온다.

그래서 손을 바들바들 떨며 글쓰기 앞에 멈출 수밖에 없다면, 이제는 선택의 순간이다. 글쓰기를 멈출지, 아니면 그 두려움을 글로 써낼지. 


보다 많은 분께서 선택의 순간에, 멈춤보다는 그 두려움을 당당하게 써 내려가길 바란다.

사람들의 관심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과, 더 오래 남는 건 기어이 써내고 표현한 내 글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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