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출퇴근하면 자연스레 5천 ~ 1만 걸음을 걷게 되는데, 주재원은 집과 회사의 Door to Door를 차로 다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 멕시코는 치안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살아야 하는 곳이므로 자유롭게 걸어 다닐 시간도 그리 많지 않다.
여느 날처럼 차 시동을 걸고, 집을 나선다.
서머타임이 시작되었음에도, 내가 출근하는 시간은 동이 트지 않거나 이제 막 갓 틀 무렵. 어두움과 밝음이 공존하며 서로 아웅다웅하는 사이 내가 운전하는 차는 앞으로 나아간다. 아침 일찍 서둘러 집을 나서는 건, 업무에 대한 압박과 책임감도 있지만 멕시코 시티의 교통체증을 피하기 위함이다. 멕시코 시티의 라디오 청취율이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페인어를 계속해서 배워야 하므로, 라디오 듣는 것을 즐기지만 그렇다고 교통체증엔 갇히고 싶지 않다.
차가 많지 않기에, 집을 나선 후 20여분이면 사무실에 도착한다.
전용 도로를 주로 사용하기에 단 두 개 정도의 신호에서만 멈추게 되는데, 그 두 신호는 사무실에 거의 다다른 지점에 있다.
멕시코 도로는 교통 체증이 일어나는 어느 곳이든 그곳에서 경제 활동이 일어난다.
누군가는 그저 돈을 요청하고, 또 누군가는 서커스를 한다. 다른 이는 물건을 팔기도 하고. 어찌 되었건 교통체증으로 멈춘 그곳은 다양한 형태로 분주하다.
마지막 전 신호에 다다르면 도움을 구하시는 할머니를 볼 수 있다.
신호에 멈춰 서더라도, 그 이른 시간엔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많이 없는데. 그 할머니는 아마도 치열한 자리싸움(?)을 피해 이 시간을 선택한 것 같다. 신호에 걸려 서있으면, 채 140cm가 되어 보이지 않는 할머니는 절룩거리면서도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 도움을 구한다.
치안의 이유로 가능하면 창문을 열지 않는 게 좋다는 조언으로 한동안은 할머니를 못 본 척했다.
더불어, 도로엔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아 그때마다 창문을 열어 도움을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이른 시간에 홀로 있는 할머니에게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느 아침부터는 창문을 열어 할머니에게 동전을 드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두 번째 신호에 다다를 때쯤이면, 나는 주섬주섬 동전을 챙기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할머니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준비했던 동전을 다시 내려놓았다. 문득, 나와 다른 사람이 드린 동전으로 끼니는 어떻게 챙기시는지가 궁금해졌다. 매일 보이던 분이 보이지 않으니 오지랖과도 같은 고민이 생겨나기도 했다.
타인에게서 느끼는 허전함.
알 수 없는 아련함이 가슴을 아렸다. 낯선 이 감정은 무엇일까. 과중한 업무로 힘든 마음에 카타르시스가 필요했던 것일까. 욱하는 마음과 함께 눈앞이 흐려졌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타인을 의식하며 산다.
그 의식 안에는 부러움과 질투, 혐오와 호감이 공존한다. 그것들이 반복되고 쌓이면, 생각과 마음 어느 한자리를 그 타인이 차지한다. 이름도 모르고 이야기 한 번 해본 적 없어도. 그러나 든 자리는 알아도 난 자리는 안다고. 어느 날 사라진 타인의 자리엔 허전함이 들어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