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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17. 2022

회사는 주인이고 나는 노예일까?

나의 주인은 '나'다.

"머슴살이를 하더라도
대감집에서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사 지원서를 검토하다 피식 웃음이 났다.

대기업을 지원하는 학생에게 이보다 더 명확한 동기가 있을까?


입사동기를 묻는 질문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모르겠다.

그것은 뻔하지 않는가. 먹고살기 위해서. 사회생활을 위해. 물론, 자아실현과 역량의 고취 그리고 CEO의 꿈을 안고 입사를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어찌 되었건 나는 이 질문이 그리 좋은 질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시, 그에 대한 대답으로 돌아가 어느 학생의 재치 있는(?) 표현을 보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웃음은 났지만 속이 그리 개운하진 않았다. 대답 안엔 생각해볼 여지가 많은 의미가 한가득 있었기 때문이다. '머슴'과 '대감'이라는 말에서 눈치챘을 것이다. '대감'은 회사이고, '머슴'은 지원자일 텐데.


그렇다면, 월급을 받고 일하는 우리는 과연 '머슴', 그러니까 회사는 주인이고 우리는 노예일까?


왜 월급쟁이는 노예의 상징이 되었을까?


온라인 검색을 하다 재미있는 이미지를 발견했다.

이 또한 현시대의 상황을 재치 있게 표현해 놓았다.

옛 노예와 현 노예의 차이. (출처: https://tailstar.net/board_issue/13885218)


이미지뿐만 아니라 현 상황을 돌아볼 글도 있다.


옛날 노예: 해지면 일 안 했다.
지금 노예: 해 지고도 일한다.

옛날 노예: 주인이 결혼시켜주고, 집 주고, 밥 주고. 생계 걱정이 없었다.
지금 노예: 결혼도 못하고, 집도 못 사고, 하루하루가 생계 걱정이다.

옛날 노예: 자기가 노예인 줄 알았다.
지금 노예: 자기가 노예인 줄 모른다.

출처: 트위터 @bearking57


위 이미지와 아래 글에서 말하는 '노예'가 누구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바로, '직장인' 그러니까 '월급쟁이'다.


왜 직장인은 노예의 아이콘이 되었을까?

아래의 이유라면 그 이유가 설명될 것이다.


첫째, 내가 원하는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한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둘째, 돈을 받는다. (이걸 받지 못하면 생계유지가 안된다.)
셋째, 100% 만족할 수 없는 계약 관계에 있다. ('갑'이 아닌 '을'의 입장으로.)


어느새부턴가, 직장인은 '노예'라는 프레임에 어울리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회사는 주인이고 나는 노예일까?


그러나 나는 이러한 '프레임'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에 위험할까? 스스로의 성장에 해가 된다. 입사 후에 나 또한 이 프레임에 걸려들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이유와 속성은 직장인에겐 아주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재미가 없었다. 꾸역꾸역 출근하는 날들이 더 많아졌고 무기력함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하라는 말을 들으면 두드러기가 올라올 것만 같았다.

또 그 소리야? 주인처럼 일하라고 말하지만 말고, 그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해주던가 월급을 더 올려주던가. 속에선 천불, 만불이 끓곤 했다.


그러나 그 열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 열에너지에 데고 다치는 건 결국 나였다. 회사가 주인이고, 나는 노예라는 프레임 안에선 아무것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 프레임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나'를 위해서.

내 주인은 누구일까?
바로 '나'가 아닐까?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내 삶과 성장을 위해서 일하는 거 아닌가? 월급은 거저 나오는 게 아니다. 내 노동력을 제공하고 '교환'하는 (성에 안차고, 항상 부족하지만...) 치환물이다. 해야 하는 일을 하며 나는 더 성장하고 있음을 느낀다. 게다가, 어디까지나 '회사'와 '나'는 계약 관계가 아닌가. 실제 노예는 계약 관계가 아닌 종속 관계다.


내 업무를 다시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던 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노예라고 생각했을 때는 안보였던 것들. 스스로가 주인이고, 이 일을 통해 수혜를 받는 건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그저 넘겼을 법한 실수들도 눈에 밟혔다.




회사가 주인이고 나는 노예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얻는 게 더 많다.

자포자기한 사람이 다리에 힘을 주고 땅을 디뎌 일어나는 것과 같다.


좋은 기억이라면 그것은 추억이고, 기분 나빴다면 그것은 경험이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부분 경험인 경우가 많다. 경험을 쌓는다고 생각한다면, 그 수혜자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주인과 노예'란 프레임은 점점 옅어질 것이다.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란 마음.

'많은 걸 경험했고, 돈을 받으며 배웠다'란 마음.


그 둘을 갈라놓는 건 프레임의 차이다.

나는 그 누구의 편도 아니다. 회사를 옹호하거나 미화할 의도는 없다.


다만, 나를 위한 프레임 벗어나기다.

그러하지 않으면 내 성장은 없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의 주인은 '나'다.

스스로가 내 주인을 다른 것으로 두려 할 때, 삶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다.


주인 의식을 갖고 일하기로 다짐한다.

누가 주인인지를 잊지 않으려 발버둥 치며.


주인의식은 주인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고자 하는 다짐이 아니다.
(중략)
내가 나의 주인으로서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고 독하게 챙기는 것.
즉, “내가 나에게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이다.

[스테르담 직장내공 1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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