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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pr 19. 2016

아생연후(我生然後)

저마다의 생존법. 조금은 낯선 아랫사람의 그것.

사람은 저마다의 생존 방식이 있다.

그 생존 방식은 말 그대로 생존하기 위에 저도 모르게 몸에 베인, 그리고 정서에 각인된 것들이다.

보통의 생존 방식은 방어기제로 많이 사용된다. 일단 살고 봐야 하므로.

물론, 때로는 본의 아니게 공격적인 것으로도 발현된다. 이 또한 일단 살고 봐야 하므로.


살아남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살아남아 주위를 돌아봤을 때. 내 주위엔 무엇이 있는가. 

살아남는데 사력을 하다 보니 주위를 둘러보지 못한 대가는 참으로 혹독할 수 있다.


아생연후 (我生然後)

"나부터 살고 보자."


그러고 난 뒤.




오늘은 한 신입사원의 처절한 '생존법'을 목도했다.

보통은 윗사람들의 '아생연후'를 목격하고는 실망감을 가지기도, 저러한 것이 쓰디쓴 삶의 단편인가 싶다가도 이내 이해를 하는 것들이 대부분인데 아랫사람의 그것을 몸소 겪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처음 직접 인터뷰를 했던 그 친구의 적극성과 쾌활함이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정도의 열심이면, 그 정도의 초심이면, 그 정도의 적극성이면 지금 어디에다 앉혀 놓아도 잘 해내리라 확신할 정도였다.


초심을 절대 잃지 말라는 조언에 다시 태어난 듯 뭔가를 결심하는 그 모습에 신뢰가 갔다.

초심이 변할 순 있어도 잃어선 안된다는 그 말에 큰 감명을 받고 결심한 모양이 기특했다.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문득,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도 말라'는 말이 뇌리를 스칠 정도였으니.


인턴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그 친구는 맘을 놓았나 보다.

그것도 아주 잘못된 방법으로.


초심은 잃다 못해 못된 attitude가 뿜어져 나왔다.

첫 인터뷰에서 언급한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고, 그 친구는 그것을 스스로 부정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그 표현이 눈 앞에 현실이 된 순간.


무엇 때문에 생존 본능을 드러낸 것인지는 모르지만, 생존 본능이라는 카드를 꺼내기에는 너무 이른 타이밍.

본격적인 업무도 시작하기 전에, 배워야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에서 살아남고자 꺼내 든 모양이었다.


본인은 Pressure라고 표현했지만, 이 표현은 곧 자신을 더 이상 터치하지 말라는 것에 다름 아닌 선언이었다.

이제 막 많은 것들을 배우고 부딪쳐 나가야 하는 이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시작되지도 않은 업무의 목전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또 한 번 믿기지가 않았다.

생존 기제를 발동했더라도, 초심은 안 건드렸으면... 주위 상황은 좀 고려했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더해졌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멘토링을 하는 나에게 아주 큰 복병이 생겼다.


조언이라는 것도, 약이라는 것도, 위로와 동기부여라는 것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에게 나 필요한 것일까?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도 조언을 하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실력일진대, 그러한 점에서는 나의 깜냥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모양이다.


내가 그토록 외쳐대는 '역지사지'.

입장을 바꾸어 그 친구의 입장이 되어본다. 

무엇으로 하여금 그 친구의 생존 기제가 활성화되었을지를 가늠하기 위해.


무작정 이해하기보다는 어느 선까지 이해가 될 지에 도전해본다.

이해가 되는 그 선까지 이해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생각이라도 해봐야 한다.


그런데, 잘 되지 않는다.

역지사지를 울부짖는 나조차 그렇게 하기 어려울 정도라니. 나의 한계인가, 나의 문제인가? 상식이라는 논제 앞에 흔들리지 않는 내 모습은 온실 속 화초였나 보다. 멘토링을 하는 사람이라면, 비상식적인 것 앞에서도 당당하게 나아가야 하고 그러한 것에 익숙하되 되돌려 놓거나 또는 최소한 조언을 던져 놓고 그 비상식적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해주는 것이 도리이자 실력이 아닐까.




멀어도 한참 멀었다.

이러한 일에 엮였다는 것이 억울하지만, 어쩌랴.

그럼에도 어쩐지,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그 친구의 앞날이 걱정되고 만다. 진심으로.

그 친구가 스스로 깨달을 그 날이 올 수도, 또 나보다 더 훌륭한 멘토가 그 친구를 바로 잡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보다 더 시급 한 건 나 자신의 추스름이다.


뒷 통수를 맞은 이 당황스러움도 삭여야 하겠지만, 이로 인해 느낀 교훈은 앞으로 나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오늘의 이 감정. 이 느낌. 이 교훈. 절대 잊지 않으면서.


역시 나는 아직도 성장해야 할 여지가 너무나 많이 남아있다.

스스로, 나는 그러해서 아직 젊다고 위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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