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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Apr 30. 2016

나는 누구를 위하여 사진을 찍는가

그동안 미안했어 그리고 사랑해

저기, 잠깐 저기 좀 서볼래? 사람들 지나가잖아, 빨리!


영문도 모르는 우리 두 아이들은 이제 제법 익숙한 듯 손가락 끝 정확한 그곳에 서서 포즈를 취한다. 사실, 가리킨 그곳에 서게 하는 것과 또 사진을 찍기 전에 포즈를 취하기까지의 과정은 험란했다. 때론 급하게 종용하기도 하고 약간의 윽박, 또 때로는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 장황한 설명이라 함은, 나중에 너희들이 사진을 보며 이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고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으니 일단 지금은 영문을 모르더라도 찍고 봐야 한다는 일장 연설이었다. 아이들이 100% 이해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다행히(?) 그대로 따라주고 있다.


대체 사진을 왜 찍을까?


이제는 누구의 손에나 들려져 있는 카메라는 눈과 마음보다도 앞서 앞에 펼쳐진 어느 장면을 '기록'하기에 바쁘다. 거기에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 또는 자신의 얼굴을 곁들여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사람은 무언가에 홀린 그 장면을 눈과 마음에 담고, 나중에라도 언제든 볼 수 있게 '기록'해 놓는 것이 본능이기 때문이다. 다만, 눈과 마음에 담는 것은 잠시 잊고 '기록'만 하는 주객전도의 것들이 일어나기에 조금은 안타까운 것이다. 문제는 알면서도 그런다는 것이다.


몇 년 간이라는 정해진 유럽에서의 주재 생활. 그러하기에 '한정적'이라는 마음가짐은, '이곳을 언제 다시 오게 될까?'라는 조급함을 양산함과 동시에 가는 곳, 보이는 모든 곳을 사진으로 담아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발동시킨다. 여기에 내가, 우리 가족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 하기 위해 그곳의 가장 유명하거나 눈에 띄는 것을 등 뒤로 하여 사진을 찍는 모양새다. 더더군다나 사람이 북적북적한 핫플레이스에서의 사진은 어떻게라도 찍고 봐야 하니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주저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순서를 빼앗기는 일이 발생하면 아이들에게 윽박 아닌 윽박을 지르게 된다. 다 너희를 위해서야...라는 그리 정당하지 않은 마음과 함께.


누구를 위하여 찍는 걸까?


'다 너희를 위한 거야'라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나도 부모님께서 찍어주신 사진을 보고 그때를 기억하고 또 추억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내가 기억하지 못했던 그때 이미 다녀왔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했다. 가지 못할 곳이라는 그저 불가능한 것에 대한 동경이 아닌, 이미 갔다 온 곳이니 언젠간 또 갈 수 있겠다는 위안과 용기가 생기곤 했으니.


그래서 내 휴대폰 사진첩 안에는 수천, 수만 장의 사진이 쌓이고 쌓여 이제는 정리조차 쉽지 않고 메모리의 용량은 그 한계를 벗어나 일정기간은 외장하드나 노트북에 사진을 옮기지 않고서는 안 되는 지경에 일렀다. 가끔 사진첩을 정리한다는 미명 하에 밤을 새워 정리하다 보면, 아이들의 성장하는 모습이 그리 신기하고 또 대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기 좀 서봐... 그래 거기, 잠깐만.... 예쁜 포즈 하고~!"라고 소리치며 사진첩에 또 수십 장의 사진을 쌓던 날. 난 그제야 깨달았다. 사진을 많이 찍긴 했는데, 정작 아이들에게 보여주진 않았다는 것을. 가끔 아이들이 사진을 찍자마자 보여달란 말에, 저기 가서 또 찍어야 하니 나중에 집에 가서 보자며 또 다른 포즈를 재촉하기만 했었다. 그리고는 물론, 집에 와서는 사진을 보여주는 것은 까맣게 잊고 만다.


'기록'이 아닌 '추억', 그리고 '현재'를 함께 하는 우리의 모습을 위해


미안한 마음에 요즘은 가끔 거실의 대형 TV에 휴대폰을 연결하여 그간 찍었던 사진을 띄워준다. 그랬더니 깔깔대는 아이들. 어디에 갔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잘대는 녀석들을 보며 많이 미안했다. 왜 진작 이렇게 사진을 찍고 보여주지 않았을까? 결국 아이들을 위해 찍었다던 사진들은 부모만이 간직한, 부모만을 위한 자기만족의 것들이었을까? 사진을 보며 자지러지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미안한 마음은 커져만 갔다.


물론, 아이들도 언젠가 커서 세계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을 보며 나에게 고마워할 수도, 또는 그러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중의 아이들'은 결국 '지금의 아이들'이 자라서 될 아이들이다. 즉, '나중의 아이들'을 위해 사진을 찍고 추억을 만드는 것보다, '지금의 아이들'에게 더 신경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어디에 서서 찍으라고 윽박지르는 것보다는, 아이들이 즐기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찍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 뒤로 에펠탑이나 두오모 성당, 빅벤이 앵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더라도, 아이들의 웃는 모습에 포커스를 더 맞추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찍은 사진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아이들과 함께 바로바로 보도록 노력해야겠다. 단순한 '기록'이 아닌, '현재의 추억'을 공유하며 우리라는 가족을 보듬어야겠다. 그러다 보면 '더 나은 나중의 우리'는 자연스럽게 따라오지 않을까?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그 자리에 서서, 그래도 못난 부모가 포즈를 취하라고 하니 즐거운 모습으로 각각의 개성을 발휘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한단 말이 하고 싶다. 이러한 마음도 무언가로 찍어 남겨두고 싶지만 그러하진 못하니 이렇게 글로 남기는 걸로. 그저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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